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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니, 요새 웬 비옷이 그리 비싸우.”

구보 박태원의 <천변풍경>은 청계천 빨래터에서 청어(비옷) 값을 탓하는 아낙네의 푸념으로 시작된다. 이 소설에 주로 등장하는 인물들은 벌이가 변변찮은 서민들이다. 5전짜리 동전을 잃어버리고는 주인에게 말도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한약국집 점원 ‘창수’, 이발소 ‘재봉이’, 남의집살이를 하는 ‘만돌이네’….

구보는 <천변풍경>에서 일제강점기이던 1930년대 서민의 삶을 카메라로 찍듯이 소상하게 묘사했다. 당시 청계천변은 가난한 서민들이 모여 사는 동네였다. 청계천이 복개공사로 자취를 감추면서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연일 이어지는 폭염에 전기세가 걱정이고, 숨 막히는 뙤약볕 아래서 누군가는 일을 해야 한다. 어쩌면 ‘지옥고(반지하·옥탑방·고시원)’ 열기를 견뎌야 하는 이들에게는 종일 에어컨을 트느라 늘어난 전기세 걱정이 배부른 소리다.

일제 때 청계천변이 도시 빈민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라면, 1960년대 이후 서울에서 못사는 동네로 손꼽히는 곳 중 하나는 삼양동이다. 삼양동이라는 이름에는 원래 ‘삼각산의 양지 바른 양쪽 동네’라는 정겨운 의미가 배어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해 ‘달동네’ 이미지가 굳어졌다. 최근 삼양동은 박원순 서울시장의 ‘옥탑방살이’로 뜻밖에 핫플레이스가 됐다. 박 시장이 지방선거 때 공약했던 강남·북 격차를 줄일 방안을 찾겠다며 지난달 강북구 내에서도 기반 시설이 취약한 삼양동에 옥탑방을 얻어 거처를 옮기면서다.

그의 옥탑방살이에 ‘보여주기 쇼’라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그래도, 하루라도 살아보면 보이지 않던 게 보이기 마련이니 탓할 일만은 아니다. 더위를 타지 않는다고 자신했던 그도 땀이 줄줄 흐르는 옥탑방에선 맥을 출 수 없고, 삼양동 오르막길을 ‘따릉이’로 다니려면 얼마나 힘든지 알았을 테다. 동네 구멍가게가 모두 사라졌다는 것, ‘솔샘시장’처럼 점포 수가 적은 시장은 ‘전통시장’으로 등록할 수 없단 점도 알게 됐다. 이 모든 것이 에어컨 아래서 머리로 상상만 했다면 미처 알지 못했을 것들이다.

박 시장은 옥탑방 입주 19일째를 맞은 지난 8일 “대한민국 99 대 1 사회를 실감하고 있다”는 소회를 밝혔다. 마침 그날은 박 시장의 옥탑방 옆집에서 6급 장애를 지닌 40대 남성이 숨진 지 수일 만에 발견된 날이기도 하다. 박 시장은 한달살이가 끝나는 날에 답을 내놓겠다고 했다. “큰 쇠문을 여는 것은 힘이 아니라 작은 열쇠”(영화 <슈퍼맨이었던 사나이>)라고 했던가. ‘원순네 옥탑방’에서 그는 ‘열쇠’를 찾았을까.

지도자가 갖춰야 할 조건 중의 하나로 공감 능력을 꼽는다. 하지만 권력자일수록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2008년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하계올림픽 때 미국 국기를 거꾸로 든 일 역시 이를 보여준다. 박 시장은 옥탑방을 나오면서 자기 시선에 맞게 국기를 거꾸로 드는 것 같은 답을 내놓지 않기를 바란다. 그가 ‘훔친 가난’이 실질적인 해결책을 마련하는 정책으로 녹아들어야 한다. 도시가스가 들어가지 않는 몇몇 집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솔샘시장이 전통시장으로 등록될 수 있게 하는 것만으로 싱겁게 막을 내려선 안된다. 폭염에 왜 누군가는 에어컨이 있는 쉼터로 갈 수 없었는지, 고독사한 남성이 서울시 ‘찾동’ 사업에서 왜 소외됐었는지를 답해야 한다.

오늘도 원순네 옥탑방은 민원인들로 북적인다. 어떤 부탁은 ‘사소’하고, 어떤 부탁은 ‘중’하다. 딜레마는 그 부탁을 다 들어줄 수 없다는 것이다. 박 시장은 “쇼면 어떤가. 나는 삶에서 피어나는 선한 영향력을 믿는다.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쇼. 그런 쇼라면 얼마든지 계속돼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원순씨의 한 달’이 서민의 고충을 아는 데 그쳐선 안될 일이다.

<이명희 전국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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