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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훈 | 연세대 대학원생


넉 달 전 벌어졌던 고려대 의대생 성추행 사건은 슬슬 정리되어 가는 것 같다. 이미 출교는 결정되었고, 법정공방만 남았다. 
법률적인 관계보다 흥미로운 것은 사건의 공판에서 등장한 어느 노부부의 발언이었다. “억울하다… 어디 세상에 가스나가 술 먹고…. 남자 앞길을 망치는… 금쪽같은….” 이 표현을 보면서 나는 좀 딴 걸 더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끔찍한 아들 사랑이 만들어낸 흥망성쇠에 대한 노스탤지어였다. 조선시대 이래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이 만들어지고 나서도 공적 공간의 책임은 대체로 남자들의 몫이었다. ‘창창한 앞날’을 보장받은 아들이 있는 집안의 가족들은 그 덕택에 잘살았다. 
집안이 무너지지 않으려면 ‘남자 앞길’을 망치면 안 된다는 평범한 상식이 통했다. 더불어 엄마는 ‘금쪽같은 아들’을 입신양명시켜야만 했다. 아들을 과거에 급제시키기 위해서 기도를 올리고 맹모삼천지교를 실천한 신사임당 같은 과거의 ‘매니저 엄마’와, 학원과 교육 컨설팅 연구소를 다니면서 아이의 입시·취업·결혼까지 다 관리하는 현대의 ‘매니저 엄마’는 큰 차이가 없다. 아버지가 자본을 대고, 엄마가 온갖 정보력을 동원하고 관리해서 입신양명시키는 게 가족을 위한 ‘필승 전략’이다. “억울하다!” 금쪽같은 아들을 키워내 봤던 ‘노부부’의 절절한 외침이 들린다.

하지만 기성세대의 상식에 콧방귀도 안 뀌는 분위기가 연출되는 것은 바로 이 모델이 붕괴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교육 전략은 ‘아들 입신양명 프로젝트’의 초기비용을 엄청 높여버렸다. 아이의 ‘자기주도학습’을 위해서 영유아 시기부터 사설 교육 컨설팅까지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게다가 이미 오래전부터 딸 가진 엄마들도 아들 가진 엄마와 똑같이 ‘입신양명 리그’에서 뛴다. 아들 하나로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입신양명 리그’의 경쟁률이 두 배로 뛰었다. ‘하우스푸어’들이 속출하면서 현금 자산이 묶이고 아이들의 ‘산출’이 시작되는 취업시장의 진입까지 점점 멀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이런 교육 전략이 여전히 흥행하는 것은 애들이 계속 빌빌대면 자신들의 노후를 전혀 보장받을 수 없어 참담할 것 같기 때문이다. 빚을 내서라도 교육에 투자하는 방법으로 ‘불안’에 맞서 싸우고 있는 것이다.

지금 젊은 남자들을 보라. ‘망칠 앞길’이 없다. 평생직장에 대한 기대는 현명한 직장인일수록 일찍 포기한다. ‘똑똑한 이직’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미래 보장은 보장성 종신보험이 대신한다. 
직장의 ‘착취’를 오매불망하며 구직하는 남자들은 엄마에게 밥을 얻어먹으며 버티거나, 시급 4320원짜리 알바로 하루하루를 비루하게 보내야 한다. ‘남자구실’은 뿌리부터 뽑혀버렸다. 권력과 돈, 둘 다 없으니 할 수 없는 노릇. ‘현시창’(현실은 시궁창)이다. 연애도 못하는 이들이 속출한다. 이러다보니 연애 못하는 남자들에 대한 대답이 유희열의 ‘ASKY’(안생겨요) 아닌가.

이러한 상황을 간파한 ‘팔불출’ 기혼 남자들은 “남편이 달라졌어요!”라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고군분투하고 있다. ‘사내구실’ 말고 ‘공감’으로 여자들과 마주쳐야 한다는 걸 깨달은 젊은 남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사고를 치거나 죄를 짓고 ‘남자니까’ 하고 얼렁뚱땅 때우는 게 통할 리 없다. 
지금까지 의대생으로 키워놓은 엄마는 피가 마르지만 할 수 없는 일이다. 노스탤지어에 빠진 어르신들은 ‘앞길 창창한’ 젊은 아들들에 대한 구태의연한 기대로 ‘가스나’ 탓을 해보지만 소통이 될 리 없다. 아직도 알량하게 오직 ‘사내구실’과 ‘언젠가 올 그날’의 로망을 꿈꾸며 엄마와 어르신들의 장단에 맞춰 춤추는 젊은 사내들이 여전히 있지만, 그것은 현실이 될 수 없는 꼭두각시춤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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