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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르벤파·에스포(핀란드) | 홍진수기자 soo43@kyunghyang.com
ㆍ4부-다른 사회를 상상한다
ㆍ핀란드 야르벤파 고교 - 옴니아 직업학교 가보니
ㆍ무학년 고교 “좋아하는 역사과목만 먼저 골라 들었어요”
ㆍ직업 학교 “건축 배우는 학생은 아예 집을 지어 팔죠”
지난 5월27일은 핀란드 야르벤파 고등학교의 기말시험기간이었다. 1주일 동안 전교생이 1년 동안 자신이 이수한 과목에 대해서 시험을 치르고 있었다. 아무리 경쟁을 중시하지 않는다지만, 어쨌든 시험은 시험이다. 기자는 조심조심 학교 주차장으로 차를 몰았다.
학교에 들어섰을 때 가장 눈에 띈 광경은 수십대의 오토바이였다. 각양각색의 스쿠터들이 나무 밑에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학생들은 자전거뿐만 아니라 오토바이를 타고 자유롭게 학교 안으로 들어왔다. 건물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1층 로비에 수백벌의 옷을 걸 수 있는 옷걸이가 보였다. 오토바이를 타고 등교한 학생들이 헬멧과 두꺼운 겉옷을 보관하는 장소다.
야르벤파 고등학교의 건물은 방사형 구조다. 가운데가 뻥 뚫려있어 여름에는 하루종일 실내로 햇빛이 들어온다. 건물 어디에서도 다른 층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웬만한 대학교 건물 못지 않게 웅장하다. 5년 전에 건물 설계를 시작할 때부터 교사들의 의견이 대폭 반영된 결과다.
학년도 학급도 없는 고등학교
상담교사인 산나 알란코와 파비 바르비넨이 1층으로 마중을 나왔다. 알란코는 “방학을 1주일 앞두고 있어 등교한 학생들이 그리 많지는 않다”며 “먼저 학교에 대해 대략적인 설명을 하고 시설을 둘러보자”고 제의했다.
학교 안내를 맡은 교사 뒤에는 라미 페나넨(17) 등 1학년 학생 4명이 기자를 돕는다며 동행했다. 이 1학년 학생들 역시 시험을 치르는 중이었다. 페나넨은 “아직 4과목 시험이 남아있다”며 “평소 수업시간에 잘 들어뒀기 때문에 따로 공부를 하지 않아도 시험을 치르는 데는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1학년생인 페나넨은 소속된 학년도, 학급도 없다. 야르벤파 고등학교는 핀란드 수도 헬싱키에서 20㎞ 정도 떨어진 야르벤파시에 있는 ‘무학년 학교’다. 페나넨을 담당하고 있는 담임교사도 없다. 핀란드에 있는 400여개 고등학교 중 2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하는 야르벤파는 핀란드에서도 ‘실험성’이 있는 학교로 알려져 있다.
지난해 8월 야르벤파에 입학한 페나넨은 우선 수업 시간표부터 짜야 했다. 처음에는 앞이 캄캄했다. 야르벤파에서 제공하는 수업은 총 300여 코스다. 도대체 어떤 수업부터 들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때 도움을 준 사람이 파비 바르비넨 선생이다. 야르벤파는 담임교사 대신 상담교사를 두고 있다. 상담교사는 신입생 등의 학교 적응을 돕고 학부모 상담도 맡는다.
페나넨은 우선 1학기 동안 7코스씩 듣기로 결정했다. 가장 일반적인 패턴이다. 1년 5학기제인 야르벤파에서는 총 75코스를 들으면 졸업할 수 있다. 이 중 47~51코스는 의무과목이다. 바르비넨 선생은 “국어(핀란드어), 영어, 수학뿐만 아니라 역사, 체육, 음악, 미술 등에서도 일정한 학점을 따야 한다”며 “나머지 코스는 자유롭게 선택해 들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페나넨은 지난 1년 동안 역사 과목만 5코스를 들었다. 1학기에 1코스씩 들은 셈이다. 역사분야 의무학점은 7코스다. 1년 만에 70% 이상을 채웠다. 페나넨은 “역사에 흥미가 많아서 핀란드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사, 경제사 등도 고루고루 공부했다”고 말했다.
페나넨의 집은 야르벤파에서 버스로 1시간이나 떨어진 곳에 있다. 일반적으로 집에서 가까운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핀란드에서는 이례적인 경우다. 페나넨은 “시설이 훌륭하고 축구, 농구, 음악 등의 특별과정이 개설돼 있어 야르벤파에 지원했다”며 “무학년제도 시스템도 마음에 들었다”고 밝혔다.
빈 교실에서 대략적인 학교 설명을 들은 뒤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겨 ‘학교구경’에 나섰다. 아무래도 시험기간이니 만큼 학생들이 예민해져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는 기우였다. 얼핏 봐서는 시험을 보고 있는지, 친구들과 모여 공부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다행히 학생들은 외부인들의 방문에 익숙한 듯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과학실이든, 미술실이든 학생들은 모두 시험지 옆에 책을 펴놓고 있었다. 바르비넨 선생은 “핀란드의 시험은 대부분 에세이로 치러진다”며 “수학도 수준이 올라가면 문제풀이 대신 에세이를 쓴다”고 설명했다.
방학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교실보다는 로비에 학생들이 더 많았다. 소파에서 책을 보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인터넷을 하거나 친구들과 수다 떨기에 열중했다. 시험기간이었지만 건물 3층 중간에 있는 도서관에서 학생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말 그대로 도서관은 ‘책을 빌려보는 곳’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도서관처럼 시험공부에 열중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핀란드의 고등학교는 일반고와 직업학교(한국의 전문계 고교)로 구분된다. 일반고로 진학한 학생들은 대부분 ‘공부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페나넨 역시 마찬가지였다. 페나넨은 “관심있는 분야를 공부하는 것이 즐겁다”며 “좋아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시험 스트레스도 거의 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공부를 너무 좋아해서’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학생들이 학교를 너무 오래 다닌다는 것이다. 핀란드에서는 고등학교를 2~4년 다닐 수 있다. 전체 고등학생의 10%가량이 ‘고등학교 4학년’을 택한다. 이들은 ‘낙제생’이 아니라 ‘모범생’들이다. 바르비넨 선생은 “대학갈 친구들은 한국과 달리 ‘고등학교에서 기초를 튼튼히 해둬야 한다’는 생각으로 수업을 들어 4년 만에 졸업하는 학생도 많다”고 설명했다.
일반 고등학교에서는 ‘공부를 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수업시간이 대폭 늘어난다. 야르벤파의 수업시간은 75분이다. 종합학교(45분)에 비해 30분이 길다. 산나 알란코 선생은 “수업이 짧으면 하루에 들어야 하는 수업 개수만 많아지고, 이는 곧 숙제의 증가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몇 년 동안 같은 반에서 지내기도 하던 종합학교 때와 달리 무학년 제도하에서는 친구들 얼굴을 꾸준히 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학기 초에는 친구를 사귀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다. 페나넨은 “(반이 정해져 있는 학교에서는)한번 따돌림을 받기 시작하면 오래 시달리게 되는 단점도 있다”며 “이곳에서는 수업시간마다 다양한 친구들을 사귈 수 있어 훨씬 더 좋다”고 말했다.
청소년·성인 함께 받는 직업교육
5월28일. 약속시간을 10분이나 넘긴 뒤에 옴니아 직업전문학교의 입구를 간신히 찾을 수 있었다. 핀란드에서 유명한 학교였지만 입구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지도에 나온 대로 길을 들어서자 주변에 있는 모든 간판이 ‘옴니아’로 시작됐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건물에는 다 ‘옴니아’란 단어가 붙어있었다. 라틴어로 ‘모두’란 뜻을 가진 이 거대한 직업교육 기관에서는 청소년과 성인을 합쳐 7000여명이 교육을 받고 있다.
직업학교로 들어가서 가장 먼저 눈에 보인 것은 상점이었다. 옴니아 직업학교에서 국제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안네 켐파이넨은 “모자, 티셔츠, 액세서리, 드레스 등 이 상점에서 파는 모든 물건은 학생들이 직접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켐파이넨은 옴니아 직업학교를 단 한 문장으로 소개했다. “모든 길은 옴니아로 통한다(All roads lead to Omnia).” 켐파이넨이 기자를 안내한 곳은 모두 ‘현장’이었다. 목공이든, 건축이든, 조경이든 모든 실습장에는 현장이 완벽하게 재현돼 있었다. 그는 “건축을 배우는 학생들은 아예 집을 만들어 분양한다”며 “간단한 목재창고는 학교에서 만들어 1500유로(265만원)에 판매하고 지난해에는 학교에서 마련한 부지에 정원이 딸린 50만유로(8억8000만원)짜리 집을 지어 팔았다”고 말했다 또 “조만간 학교 시설을 리모델링할 예정인데, 대부분 학생들의 손에 맡길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학생들이 지어 판 건물은 학교가 10년 동안 보증을 해 준다.
옴니아를 통하면 누구라도 새로운 기술을 익혀 일자리를 찾을 수 있다. 옴니아에는 직업학교 외에도 성인교육센터, 도제훈련센터, 청소년워크숍 등이 있다. 에스포시를 비롯한 3개 지자체에서 투자해 설립했다. 직업학교에만 학생 2000명이 있고, 성인교육센터에서는 1500명이 다시 기술을 익히고 있다. 스스로 원해서 들어오기도 하고, 회사에서 위탁교육을 맡기기도 한다.
옴니아 직업학교가 인기를 끄는 이유는 나라 전체에 ‘직업의 평등’이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유하 페카 사리넨 교장은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이 대학을 나왔든, 박사학위를 갖고 있든 상관없이 똑같은 대우를 받는다”며 “보통 회사는 배관공 등 육체노동자에게 더 많은 돈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교장은 “모든 핀란드인은 직업을 가질 권리가 있고 단 한명도 일할 권리에서 소외돼선 안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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