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견된 일이었다. 지난 8월14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날’에 성급히 설립선언을 하고, 여성가족부 산하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이 ‘위탁사업’ 형식으로 일본군 위안부문제연구소를 출범시켰을 때부터다. 법적 근거는 물론 연구소의 독립적인 운영과 권한이 보장되지 않은 채, 관련 예산을 한데 묶어 시작한 연구소가 제 역할과 기능을 하리라 보는 사람은 드물었다.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성폭력방지본부 하부기관인 연구소 소장이 원장의 결재권과 인사권으로부터 자유로우리라 생각하는 사람도 드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이라도 시작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당위성에 설득돼 소장직을 수락한 것은 오로지 역사에 대한 책임감에서였다.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누구보다 오래 연구하고 헌신적으로 활동해온 김창록 교수의 소장직 사퇴는 ..
그날은 8월14일,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이었습니다. 27년 전, 고 김학순 할머니께서 강철보다 단단한 벽을 넘어 너무나도 어렵게 그러나 너무나도 당당하게 수많은 기자들이 모인 곳에서 자신의 경험을 밝힌 날이었습니다. 자연스러운 남성의 성욕이자 여성의 숙명으로 여겨져 피해자가 감추어야 할 정조에 관한 죄일 때, 가문의 수치이자 민족의 수치로 손가락질당할 때, 바로 그 일이 가부장제와 식민주의, 군사주의가 공모한 어마어마한 성폭력 범죄행위임을 낱낱이 전 세계에 알린 그날이었습니다. 가족과 공동체, 국가가 모두 외면하던 시절, 피해자가 생존자로 다시 활동가로 거듭나면서 수많은 다른 피해자들의 손을 잡기 시작한 그날, 전 세계를 돌며 ‘거리에서, 강연장에서, 법정에서’ 피해 사실을 알리고 진실을 규명하고자 ..
평남 남포 출신 박영심 할머니. 1938년 3월, 그녀는 일제의 ‘처녀 공출’에 걸려 일본군 성노예가 되었다. 중국 난징에서 3년을 보낸 뒤 미얀마의 라시오, 윈난성 쑹산(松山) 등의 위안소를 전전했다. 6년 동안 많은 날은 하루 30~40명씩 일본군을 상대했다. 1944년 9월, 일본군이 패주하면서 연합군 포로가 됐다. 그녀는 미군의 신문에 게재된 위안부 사진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사진 속의 여인은 만삭이었다. 2000년 그녀는 “사진 속 여인이 나”라고 밝혔다. 또 난징과 윈난의 옛 위안소에 가서 “내가 여기에 있었다”고 외쳤다. 2015년 난징 리지샹(利濟巷) 위안소 옛터에 기념관이 들어선 데는 그녀의 증언이 결정적이었다. 기념관 마당에는 임신한 위안부의 동상이 세워졌다. 충남 논산 출신 송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