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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견된 일이었다. 지난 8월14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날’에 성급히 설립선언을 하고, 여성가족부 산하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이 ‘위탁사업’ 형식으로 일본군 위안부문제연구소를 출범시켰을 때부터다. 법적 근거는 물론 연구소의 독립적인 운영과 권한이 보장되지 않은 채, 관련 예산을 한데 묶어 시작한 연구소가 제 역할과 기능을 하리라 보는 사람은 드물었다.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성폭력방지본부 하부기관인 연구소 소장이 원장의 결재권과 인사권으로부터 자유로우리라 생각하는 사람도 드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이라도 시작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당위성에 설득돼 소장직을 수락한 것은 오로지 역사에 대한 책임감에서였다.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누구보다 오래 연구하고 헌신적으로 활동해온 김창록 교수의 소장직 사퇴는 그래서 안타깝지만 불가피한 것이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식민지 과거사이기도 하지만 현재진행형인 전시성폭력과 여성에 대한 인권침해 문제이기도 하다. 식민주의, 인종주의, 성차별과 계층 문제가 근본적으로 얽혀 있는 국가폭력이자 성폭력 문제다. 성노예제도라는 거대한 구조의 문제 위에 얹어진 동아시아 냉전체제, 제국주의, 군사주의, 가부장제에 의한 삭제와 침묵의 역사가 있고, 30여년 운동이 구축해온 대항 역사가 있다. 일본 정부의 지속적인 부인과 왜곡, 피해자 폄훼가 이어지는 가운데 한국 정부의 무지와 무시, ‘관리’와 방임, 선택적 강조와 배제, 인정과 타협이라는 어정쩡하고 이중적인 태도가 있었다. ‘2015 한·일 합의’와 화해·치유재단 설립은 어쩌면 그러한 정부 태도의 종합판이라 할 수 있다.

연구소 설립에 대한 구체적인 요구는 바로 이 지점에서 탄생했다. 당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등 지원단체들과 시민단체들, 일본군위안부연구회 등 학계는 ‘2015 한·일 합의’에 강력히 반발하며 문제점을 낱낱이 드러냈고, 한국 정부의 결단과 노력을 요청했다. 이제는 한국 정부가 나서서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의 실상을 밝히고, 그간에 축적된 자료를 정리하며 흩어진 내용들을 한데 모으고, 피해자를 추모하는 집합적 기억의 틀을 진지하게 다시 고민하며 다음 세대에 계승할 작업을 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법학, 역사학, 사회학, 인류학, 여성학, 철학, 정치외교학, 인류학, 구술사, 기록학, 문학과 문화연구 등 다각도로 연구가 진행되어 왔고 진행되어야 할 사안인 만큼 학제 간 벽을 넘어 체계적인 연구와 기록·관리·환류체계를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시성폭력의 개념을 세우고 여성인권규약을 선도한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운동의 의미를 역사화할 책임이 이제 우리 정부에게도 있지 않으냐고 반문했다. 한국이라는 국가의 위상을 고려할 때, 베를린의 홀로코스트 박물관처럼 의미 있는 기억의 장을 만드는 일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않으냐고 질문했다. ‘국립 일본군 위안부연구소 및 역사관 건립을 위한 연구(가칭)’에서 제시된 독립성과 자율성, 지속 가능성이 담보된 연구소와 센터 설립안은 그런 과정의 연속선에 있었다.

그런데 여가부 산하 여성인권진흥원 산하 성폭력방지본부 산하 위탁사업 형식의 연구소라니. 문재인 정부가 100대 국정과제의 하나로 내건 연구소의 위상이 이 정도라면 정말 창피한 노릇이 아닌가. 소장 사퇴 문제를 개인 간의 갈등 문제 정도로 간주해 처리하고 현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또 다른 무리수를 두려는 조짐마저 보이고 있으니, 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행태인가. 무지로 저지른 죄 또한 죄이며, 그 죄를 덮기 위해 또 다른 죄를 지어온 역사를 우리는 무수히 목도하지 않았던가. 그 때문에 발생한 부수적 피해의 넓이와 깊이는 얼마나 심대하며, 이를 회복하기 위한 시간과 에너지는 또 얼마나 많이 투여되었던가.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고 판단되면 지금이라도 다시 시작하는 것이 낫다. 방법은 두 가지다. 우선 여가부 스스로 연구소를 ‘용역 프로젝트’ 정도로 여기고 있는 듯하니, 진흥원 사업 종료 시기인 3월31일 이후 예전처럼 예산과 사업을 직접 관리하면 된다. 또 다른 방안은 독립연구기관으로 가는 로드맵을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용역사업’을 잘 수행할 수 있는 다른 기관에 과제를 수탁하게 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든, 여가부 차관 직속 민관 TFT를 만들어야 한다. 각계 전문가들과 관련 단체들은 물론 여가부 관료, 관련 부처 파견공무원, 민간 변호사 등이 참여한 형식으로 구성된 TFT에서 국립 연구소(혹은 센터)의 법적 근거, 조직, 제도 등을 세팅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문자 그대로 독립성과 자율성을 갖추고 충분한 자원을 확보한 연구기관 설립을 위해 장기 계획이 세워져야 한다.

며칠 전에도 생존자 한 분이 세상을 떠나셨다. 문재인 정권은 위안부 피해여성들이 다 돌아가시기 전에 문제를 해결한답시고 졸속으로 사태를 봉합하는 우를 다시는 범하지 않길 간절히 바란다. 문제의 본질을 대면하여 진실과 정의로써 응답해야 할 의무, 전 세계 시민들에게 역사적 의미를 전승할 의무는 한국 정부에 있다.

<이나영 | 중앙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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