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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남 남포 출신 박영심 할머니. 1938년 3월, 그녀는 일제의 ‘처녀 공출’에 걸려 일본군 성노예가 되었다. 중국 난징에서 3년을 보낸 뒤 미얀마의 라시오, 윈난성 쑹산(松山) 등의 위안소를 전전했다. 6년 동안 많은 날은 하루 30~40명씩 일본군을 상대했다. 1944년 9월, 일본군이 패주하면서 연합군 포로가 됐다. 그녀는 미군의 신문에 게재된 위안부 사진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사진 속의 여인은 만삭이었다. 2000년 그녀는 “사진 속 여인이 나”라고 밝혔다. 또 난징과 윈난의 옛 위안소에 가서 “내가 여기에 있었다”고 외쳤다. 2015년 난징 리지샹(利濟巷) 위안소 옛터에 기념관이 들어선 데는 그녀의 증언이 결정적이었다. 기념관 마당에는 임신한 위안부의 동상이 세워졌다.

영화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의 한장면.

충남 논산 출신 송신도 할머니. 16세 때 시집간 그녀는 무서워 첫날밤 도망쳤다. 안절부절못하던 그녀에게 ‘위안부’ 중개인이 접근했다. 도착한 곳은 중국 후베이성 우창(武昌)의 위안소였다. 그곳에서 그녀는 여러 차례 임신을 했다. 사산한 적도 있었다. 이후 한커우(漢口), 웨저우(岳州) 등 여러 위안소를 거쳤다. 총탄이 날아오는 중에도 군인을 상대했다. 해방 후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녀는 1993년 4월 일본 정부를 상대로 공식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냈다. 10년간 법정 투쟁의 끝은 패소였다. 그러나 굴하지 않았다. 2009년 상영된 다큐멘터리 영화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는 그녀의 법정 투쟁 기록이다.

일본군성노예 피해자 20여만 명 중 남북한 정부에 신고 된 피해자 수는 500명에 불과 합니다. 위안부 기림일인 14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정의기억재단이 신고된 500명을 기리는 소녀상 500개를 전시하여 이름 없이 사라져간 피해자들을 기억하는 캠페인을 하고 있습니다. 전시된 소녀상은 8시간 14분 동안 전시된 후 사전 신청자들에게 전달 됩니다. 이상훈 기자

‘위안부’ 피해자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떳떳하지 못한 몸’이라며 쉬쉬했다. 40년 넘게 가슴에 묻고 살아왔다. 위안부 문제에 한국 정부는 소극적이었고, 일본은 부인했다. 한 증언이 오랜 침묵을 깼다. 1991년 8월14일, 김학순 할머니는 TV에 나와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밝혔다. 파장은 컸다. 용기를 얻은 ‘위안부’ 생존자들이 하나둘 증언에 합류했다. 피해 신고자는 남한 기준 240명, 이 중 생존자는 28명이다. 피해자들의 기억과 투쟁이 한국 현대사를 새로 썼다. 그들의 기억을 평화와 인권 증진으로 발전시키는 일은 남아있는 자들의 몫이다. 뒤늦게 정부가 동참했다. 오늘, 8월14일은 올부터 국가기념일로 지정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날’이다.

<조운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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