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공동체 생활을 할 때는 대학 강의를 가급적 하지 않으려 했다. 공부 시간을 확보하려는 욕심도 있었지만 상업화된 대학에 대한 거부감이 컸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비싼 등록금과 강사의 값싼 노동력을 쥐어짜서 높은 건물을 세우고 그 이마에 진리니 자유니 하는 말들을 거침없이 써대는 그 대담한 위선을 견디기 어려웠다. 그런데 생계가 그리 여유 부릴 형편은 아닌지라 욕을 하면서도 그놈의 강사 자리를 찾아 대학 언저리를 들락거린다. 대학 강의에 다시 나섰을 때 나는 내 발로 걸어 들어가면서도 누군가 내 목을 끌고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내게 숨구멍을 터준 것은 학생들이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학생들은 어느 순간 빛난다. 아마도 그 빛에 홀려 대학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겠구나 싶다. 작년에 세..
7년 전쯤 노들장애인야학에서 첫 수업을 하던 날,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다름 아닌 고요였다. 내 학창시절 선생님들은 수업 종이 쳤는데도 떠들어대던 아이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꽤나 고생했다. 그런데 첫 수업에서 나는 소란이 아니라 고요를 이겨내야 했다. 좁은 교실에 열 명 안팎의 학생이 있을 뿐인데도 상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전화기에 더 고함을 질러대는 사람처럼 나는 목청을 한껏 높였다. 그러나 내가 그날 들은 소리라고는 전동휠체어를 움직일 때 나는 전자음을 빼고 나면 대부분이 내가 낸 소리였다. 나는 내 말만 들었던 것이다. 그날 학생들 중 음성 대화가 가능한 사람은 서넛 정도였다. 그것도 힘겹게 한 단어씩, 아니 한 글자씩 발성하기 때문에 한 문장을 말하는 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어떤 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