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부산에서 태어나 스무 해 남짓 갯내음을 맡으며 자랐다. 그 후에는 서울에 올라와 대부분의 시간을 도회지에서 지냈으니, 억지로 끼워 붙인다면 농촌마을 이장보다는 어촌계원 쪽에 더 가까운 사람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언제부터인지 귀촌을 꿈꾸게 되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아파트에서 개를 키우면 안된다며 자치회에서 연일 으름장을 놓던 무렵이 아니었나 싶다. 이웃사람 눈치 보지 않고 마당 있는 집에서 개를 키우며 살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대로 서울과 그다지 멀지 않은 시골마을에 주민등록을 옮겨놓고 15년 전쯤 엉성한 집을 짓게 되었는데, 그것이 이곳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였다. 시골에 내려와 살면서도 꽤 오랫동안 마을은 내게 낯설기만 한 곳이었다. 아침이면 마당에 내려앉는 햇빛을 뒤로하고 일터로 ..
마을 하나가 아이 한 명을 키운다는 말이 있다. 서른 넘어 몇 살 더 먹고보니 나로 말하자면 온 동네 하나가 사람 하나를 살렸다는 실감이 든다. 한창 시절에는 제 잘나서 어찌어찌 살아 있는 줄로 알았는데, 이제 보니 그 사소하게 살아 있는 하나하나의 순간들에 내가 잘한 것은 없고 거의 다 남의 덕이었다. 오랜만에 서울에 가서 3호선 지하철을 타고 옥수역을 지나면서 옥수동 산꼭대기를 바라보니 근사한 새 아파트들로 가득했다. 듣기로는 강남으로 보낼 수 있는 학군도 되고 교통도 괜찮아서 집값도 꽤 올랐다고 한다. 내가 살던 5년쯤 전에는 재개발이 확정되긴 했지만 까짓거 들어오기 전까지 버티자, 하는 식이라서 내가 가진 우스운 돈으로도 방을 얻을 수 있었다. 직장이 강남이라 교통이 편리했으나 퇴근길에는 숨이 턱..
환절기도 아닌데 머리를 감고 나면 옥수수수염처럼 머리카락이 술술 빠져나왔다. 빠진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비빈 다음 돌돌 말아 바구니에 모아둔다. 동전처럼 차곡차곡 모아두었다가 바구니가 넘쳐 뚜껑이 들썩일 때쯤이면 바늘꽂이도 만들고, 자질구레하게 솜 넣을 일이 있을 때 솜 대신 넣고 부자가 된 기분으로 열심히 머리카락을 모으며 몇 년이 지났다. 집 안 이곳저곳 솜 대신 도톰하게 머리카락으로 채워넣고, 이만하면 충분해하며 만족해할 때쯤 갱년기 탈모증이라는 진단을 받게 됐다. 파마 안 하고, 술 담배 안 하는데 탈모라니? 불면증에, 식은땀에, 탈모에, 비만에…. 나이는 세월 가면 절로 느는 거라 알고 살았다. 나이는 훈장과 같아서 그냥 먹는 게 아니고 치르는 대가가 컸다. 강의 중에 흐르는 땀과 불쑥불쑥 얼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