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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하나가 아이 한 명을 키운다는 말이 있다. 서른 넘어 몇 살 더 먹고보니 나로 말하자면 온 동네 하나가 사람 하나를 살렸다는 실감이 든다. 한창 시절에는 제 잘나서 어찌어찌 살아 있는 줄로 알았는데, 이제 보니 그 사소하게 살아 있는 하나하나의 순간들에 내가 잘한 것은 없고 거의 다 남의 덕이었다.

오랜만에 서울에 가서 3호선 지하철을 타고 옥수역을 지나면서 옥수동 산꼭대기를 바라보니 근사한 새 아파트들로 가득했다. 듣기로는 강남으로 보낼 수 있는 학군도 되고 교통도 괜찮아서 집값도 꽤 올랐다고 한다. 내가 살던 5년쯤 전에는 재개발이 확정되긴 했지만 까짓거 들어오기 전까지 버티자, 하는 식이라서 내가 가진 우스운 돈으로도 방을 얻을 수 있었다.

90년대 중반 옥수역 부근 옥수8구역 재개발지역 전경 (출처 : 경향DB)


직장이 강남이라 교통이 편리했으나 퇴근길에는 숨이 턱까지 차올라 식식대며 산꼭대기를 올라야 했다. 돈 모으면 이사가야지, 하지만 죽자고 해도 양지바른 지상에 내려가기 쉽지 않았다. 게다가 그때는 술이 왜 그렇게 잘 들어가던지. 실은 맛있어서 마신 게 아니라 마시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서 마셨을 것이다.

요즘은 술을 마시지 않지만, 나는 도대체 내가 그때 뭘 그리 견디지 못했는지 지금도 도통 알 수가 없다. 아마 새파랗게 젊다는 사실 자체가 버거웠던 게 아닐까. 이놈의 계집애야 젊음을 그렇게 쓸 거면 날 줘, 하는 소리가 그때의 나를 향해 저절로 튀어나오지만 이미 지나가버린 세월이다.

화려하거나 예쁜 인테리어나 아기자기한 음식을 좋아하지 않아서, 언제나 약수시장 반경 100m 안쪽으로 세 군데의 꼭짓점을 그리며 마셨다. 40년 된 순댓국집, 30년 된 치킨집, 술을 시키면 안주를 거저 내주는 막걸리집이었는데 순댓국집은 새벽 다섯 시, 치킨집은 오후 세 시부터 문을 열었으므로 휴일에는 대낮부터 혼자 여유롭게 마시는 적이 많았다. 두꺼운 책 한 권 끼고 책갈피 한 장에 막걸리 한 모금은 참 달았다. 물론 술 때문에 일어난 일들이 모두 이렇게 달콤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얼마든지 더 담즙처럼 씁쓸해질 수 있었던 것을 막아준 것이 바로 동네가 아니었을까. 음주운전을 할까봐 오토바이 키를 맡기지 않으면 술을 내주지 않던 어떤 이모가 아니었더라면 큰일이 나고도 남았을 것이다. 돼지 간을 푹푹 썰어주며 옥수동 옛날 풍경을 들려주던 팔순 넘은 할머니, 그 집 국물이 아니었으면 마음을 어떻게 데웠을까. 게다가 그들은 내가 슬슬 취할 것 같다 싶으면 반드시 합심해서 누군가 올 때까지 나를 붙잡고 있었다. 누가 찾으러 오면 치킨집에 가봐라, 방금 전까지 순댓국집에 있었다, 제보도 신속했다. 취해서 나 갈래요 하고 일어나면 가긴 어딜 가, 누구 올 때까지 여기 있어 하고 몇 번이나 내 팔을 붙들곤 했다. 지금 보니 아 그렇게 붙잡아준 사람들이 있어서 내가 살아 있구나 싶다. 술이 나를 죽여간 만큼 술집 주인들이 살려낸 것이다. 참 구차하게 이어온 목숨이구나, 앞으로는 구차한 목숨을 소중히 여기며 열심히 살아야지 싶다. 재개발에 밀려 지금은 다들 떠나신 분들, 안녕들 하십니까….


김현진 |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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