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평균 키보다 네다섯 배 정도 길기 때문에 우리의 구절양장 소화기관은 똬리 치듯 구부러져 있다. 입으로 들어온 영양소를 최대한 흡수하려는 절박함이 고스란히 반영된 해부학이다. 사실 인간이 음식을 먹는 이유는 육안으로 식별 불가능한 우리의 작은 세포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다. 그렇기에 그들이 먹을 수 있게 아주 잘게 쪼개주어야만 세포가 살고 세포의 집합체인 우리도 산다. 단백질은 스무 종류의 개별 아미노산으로, 전분은 포도당으로 그리고 지방도 지방산으로 쪼개져야 비로소 소장에서 원활한 흡수가 가능해진다. 광어에서 온 단백질 정보와 감자에서 온 전분의 정보가 이런 기본 단위로 쪼개지지 않은 채 흡수되면 생명체는 곧바로 면역계를 출동시킨다. 해독되지 않은 날것 정보를 내가 아닌 ‘비아’(非我)로 인식하기 ..
우리는 지구가 생긴 지 45억년이 넘었다고 배운다. 얼추 100마이크로미터인 머리카락 한 올의 지름을 1년이라 치면 지구의 나이는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인 약 450킬로미터에 해당한다. 우리의 머리카락 45억개를 빈틈없이 잇대 세우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일직선으로 연결할 수 있다는 말이다. 사퇴하긴 했지만 한때 나와 동종업계 사람처럼 보였던 한 장관 후보자는 지구의 나이가 6000년 정도라고 ‘신앙적으로’ 주장했다. 여기저기 뒤져보니 1650년대 아일랜드의 주교 어셔(James Ussher)라는 사람이 성서를 꼼꼼히 해석한 뒤 지구가 기원전 4004년 10월23일에 탄생했다고 말했단다. 이 주장에 따르면 2017년인 현재 지구는 6021년에서 한 달 정도가 모자란 세월을 살았다. 앞의 비유를 적용해보면 ..
점화에 의한 가스 팽창이 피스톤을 움직이고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은 터빈을 돌려 전깃불을 밝힌다. 연료가 계속 공급되고 상류에서 물이 지속적으로 흘러드는 한 자동차는 움직이고 터빈은 전기를 생산할 것이다. 이런 현상을 두고 사람들은 에너지의 총량은 변하지 않으며 다만 변환될 뿐이라고 말한다. 혹은 폭포 위의 물이 가진 위치 에너지가 전기 에너지로 변화했다고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백두산 장백폭포처럼 그냥 아래로 떨어지는 물은 무슨 일을 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아마 자갈을 좀 더 아래쪽으로 밀어냈거나 아니면 지축을 흔들면서 지각을 구성하는 물질의 온도를 높였을 것이다. 아래로 떨어진 물이 폭포 위로 저절로 올라가지 못하듯이 터빈을 돌리지 못한 에너지도 다시 회수될 수는 없다. 이렇듯 유용한 형태..
시인 김수영이 노래했듯이 풀은 쉽사리 눕는다. 인간의 경험이 대뇌 피질의 신경세포 시냅스에 각인되어 있는 까닭에 우리는 풀과 나무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안다. 경계가 다소 모호한 대나무(대나무는 볏과의 풀이다)와 담쟁이덩굴(나무다) 같은 식물을 논외로 치면 대부분의 풀은 한 해가 가기 전에 땅 위로 솟아난 부위인 줄기가 죽으면서 사라진다. 죽기 전에 풀은 서둘러 꽃을 피우고 많은 양의 씨를 주변 여기저기 퍼뜨려 놓아야만 다음을 기약할 수 있다. 한 세대가 빠르게 지나가기 때문에 풀의 삶은 간소할 수밖에 없다. 반면 나무는 자신의 내부에 죽음을 안고 살아간다. 풀과 나무는 둘 다 관다발 조직을 갖는다. 물이나 영양분이 들고 나는 통로인 관다발은 물관과 체관으로 구성된다. 뿌리를 통해 흡수된 물과 무기 염류..
2000년대 중반에 읽은 한 국내 문학상 수상작은 아픈 아내를 떠나보내는 중년 사내의 뒷모습에 관한 것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그 사내가 전립선 비대증으로 인해 방광 비우기를 힘들어했다는 대목만 흐릿하게 기억난다. 방광에서 몸 밖으로 오줌을 내보내는 길목에 위치한 전립선이 부으면 마땅히 배설되어야 할 노폐물이 방광에 고일 것이라는 사실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방광은 노폐물을 잠시 저장하는 창고에 불과한 것일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먼저 생명체가 물에 녹는 폐기물을 처리하는 과정에 대해 살펴보자. 나트륨이나 염소, 인과 같은 무기 염류를 논외로 치면 수용성 폐기물의 대부분은 요소와 암모니아다. 이들은 모두 질소를 함유하는 화합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질소를 몸 밖으로 내보내는 장치가 동물 생리..
외계인의 대대적 침공으로 인한 인류 멸망 직전의 순간, 학생 스무 명과 어른 한 명이 남아 있다. 1분이 지나지 않아 어른도 숨을 거둘 것이다. 장차 인류의 대를 이을 이 어린 친구들에게 어른은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미국의 물리학자인 리처드 파인만은 “이 세상 모든 것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하겠다고 자못 비장한 어투로 다짐했다. 맞는 말이다. 세상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서로 충돌하는 100가지가 조금 넘는 원자로 구성되었다. 그 중 몇 가지는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금, 산소, 수소, 우라늄 등이 그런 원자들이다. 하지만 금이 있고 원자를 안다고 해서 어린 학생들이 전기를 만든다거나 곡식을 수확하지는 못하겠거니 생각하니 파인만의 저 ‘일갈’도 다소 맥 빠지는 느낌이 든다. 내가 ..
- 5월 3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고개를 들어 앞을 보면 새로 돋은 세쿼이아 푸른 이파리가 눈에 어둡다. 등나무가 꽃을 매달고 은사시나무가 바람의 흐름에 이파리를 맡겼다. 봄 햇살에 몸이 가려워 잎이 돋아난다는 억지마저 수용할 만큼 연둣빛 봄 잎은 아름답다. 하지만 지금 식물의 잎에서는 아마 광합성 공장이 부산하게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비록 온대지방의 겨울에는 광합성 공장이 가동을 멈추지만 아마존과 사하라 이남의 열대우림과 사바나에서 전 지구적 탄소 고정을 지속하는 덕분에 지구는 일 년에 약 100기가t이 넘는 양의 탄소를 고정한다. 탄소를 고정한다는 말은 식물이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붙잡아 탄수화물을 만든다는 뜻이다. 우리는 식물이 고정한 탄소의 일부를 곡물의 형태로 소비한다. 유엔식량농업기구(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