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에선 여우를 영깽이라고 한다. 강원도민 율곡 선생이 십만 양병설을 주장할 때도 영깽이를 들먹이셨다는 우스갯소리. “왜눔들이 움메나 빡신지 영깽이(여우) 같애가지고요. 조총이란 것을 맹글었는데요. 쪼그마한 구녕을 뚤봐서 눈까리를 들이대고 존주어서리 들이 쏘며는요. 쎄사리가 빠지쟌소. 일이만은 택도 없고 십만 군사는 길러내야 떼까리로 뎀비도 끄떡없지비요.” 조선시대에도 야생에 흔했던 여우, 여시, 영깽이. 야생사진가 호시노 미치오는 사십대 초쯤 불곰에 습격당해 죽었다. 알래스카에서 대학생활을 했는데, 여우 사진을 많이 찍었다. 북극여우는 깜찍하고 귀여우나 먹이 앞에선 날렵하고 생존 능력도 뛰어나다. 연보랏빛 야생 크로커스가 핀 강가 둔덕. 가문비나무숲이 흐드러진 에스키모 마을. 바다표범 육포를 나눠 먹..
막심 고리키는 혹독한 유년기를 보냈다. 그때 만난 이웃사촌을 평생 잊지 못했다. 시인과 매춘부, 나환자와 수녀, 부두노동자, 무덤 파는 인부, 묘지 경비원, 교수형 집행인, 도둑과 거지, 소매치기 사기꾼, 살인 수배자, 양치기, 열쇠와 시계제조공, 이발사, 마법사, 고물상, 곱사등이, 새장수, 낚시꾼 어부, 재봉사, 결핵환자, 떠돌이 악사들. 공동묘지 파는 인부는 무덤 팔 때도 아코디언을 짊어졌단다. 그는 지옥을 안 믿었다. 의로운 자는 거룩한 곳으로 가고 죄인의 영혼은 육체 속에서 벌레들이 다 파먹을 때까지 남는다 말했다. 그는 죽은 자를 위해 세속 노래를 연주해줬는데 불경스럽다며 신부에게 욕을 얻어먹었다. 고리키는 신부가 아니라 무덤 파는 인부를 성스럽게 여기고 글로 남겼다.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도 ..
들판에 보이던 염소가 한 마리도 안 보인다. 아기를 가져 배가 남산이 된 염소, 귀염둥이를 데리고 다니는 염소, 맴맴 돌다가 목줄에 감긴 염소, 우두커니 먼산바라기를 하는 수행자 염소, 뺀질뺀질한 양아치 염소, 안 가겠다고 삐대고(버티고) 앉은 떼쟁이 염소, 입삭낭구(잎사귀)를 죄다 뜯어먹고 배터지기 직전의 부잣집 염소, 졸다가 경운기 소리에 자망해서 뒤로 나자빠진 염소. 뿔자랑을 하며 깔짝깔짝 싸움을 거는 염소. 세상 뭐 있어, 디룩디룩 살찐 염소, 멀뚱멀뚱 똥개를 쳐다보는 염소, 부잡스러운 염소, 시부렁거리는 염소, 암컷을 쫓아댕기는 염소, 명주 솜털만큼 보드랍고 얌전하니 시말스러운 염소. 흑사탕처럼 검은 똥을 뻐르적뻐르적 싸놓은 염소…. 갑자기 하얗고 검은 염소들이 보고 싶어라. 내년 봄까지 기다려..
이른 김장철. 이 집 저 집에서 구수한 깨 볶는 냄새. 배춧잎의 새하얀 고갱이 향기가 또 얼마나 다디단지. 나는 김장김치를 얻어먹는 베짱이. 밭에선 할매들이 배추를 뽑아 다듬고, 나는 소나무를 성탄트리 삼아 별과 방울을 매달았다. 팝스타 스팅은 성탄 캐럴을 한장 냈는데, 이라는 음반. 앨범에는 팬들에게 띄운 장문의 편지가 들어 있다. “나는 이탈리아 토스카나에 있는 녹음실에서 한해 겨울을 보냈어요. 피렌체 북부지방의 찬바람이 매서웠죠. 일곱명의 음악가들과 모직 코트를 껴입고 주방 난로에 둘러앉아 머그잔으로 손을 데웠죠. 녹음기간 11월부터 3월까지 그 지방의 추위와 어둠을 견뎌야 했어요. 어찌나 추운지 입김이 풀풀 나오고 길은 얼음장이었죠. 나는 어릴 적 깜깜한 새벽에 아버지와 우유배달을 하면서 자랐어요..
원고 청탁엔 거절밖에 달리 대책이 없다. 아무 데나 걸터앉아서 판소리를 내질러서야 되겠는가. 예전엔 여기저기 연재를 많이 했었다. 하지만 써재낀 글들을 책으로 묶는 일은 낯부끄러워서 차마 하지 못했다. 세상에 사람은 많으나 사랑은 한 사람뿐이듯 내 글은 재주가 아닌 진심이고 싶었다. 그런 글을 찾아 살게 해주신 여러 은인들이 계시다. 감사한 인연들. 오래전 ‘샘터’라는 잡지에 수필 연재를 다년간 했었다. 하루는 샘터의 뒷방을 지키던 동화작가 정채봉 샘이 전화를 주셨는데, 무슨 이야길 나누다가 정샘의 글 가운데 ‘택시 번호 연하장’ 얘기로 미소가 번졌던 기억. “지난해 송년 모임에서였습니다. 친구가 수첩 중의 한 장을 끊어서 송구영신이라고 써서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안쪽을 들여다보니 웬 택시 번호가 줄줄..
“정원의 고꾸라진 나무는 땅심이 좋지 않음을 말해주네. 하지만 길 가던 사람들은 나무가 구부러져 볼품없다고만 흉보네. 바다에 떠 있는 근사한 요트보다는 어부의 찢긴 그물이 내 눈에 들어오네. 나이가 사십이 되자 소작농의 아내는 허리가 휘었다네. 나는 그 굽은 몸에 관해 노래하네. 아리따운 아가씨의 따스한 가슴은 외면한 채 말이네. 나도 사과나무에 피는 꽃을 제목으로 시를 쓰고 싶다네. 하지만 얼토당토않은 아무개의 연설에 분개하는 일에 마음이 앞서가네. 나를 책상으로 당겨 앉게 하고 시를 쓰게 하는 것은 역시 노여움이라네.”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라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저 총총한 시. 우리는 굵직굵직한 분란과 소요를 겪으면서 가까스로 예까지 살아왔다. 때마다 분노하고 사랑하면서 헤쳐온 길. 그러면서..
주정뱅이 아저씨가 밤새 퍼마시고 집에 들어오니 곤히 자던 부인이 벌떡 일어나 고함을 내질렀다. “새벽 두시예요. 차라리 더 마시고 곧바로 출근을 하지 그러셨수. 집에는 왜 들어와서 달그락거리고 잠을 깨냐고요. 나도 술을 못 마셔서 이런 줄 아슈?” 그러자 아저씨 대답. “그러게나 말입니다. 이 시간에 문을 열어주는 집이 이 집뿐이라서 들어왔소. 미안해요잉.” 냉장고에서 맥주를 한개 꺼내더니만 텁석 식탁 의자에 앉더라는…. 그 말이 우스워서 둘이 그 맥주 한캔을 나눠 마셨다는 훈훈한 결말. 밤을 새우는 열정. 무어라도 하나 열심히 끈기 있게 하는 사람을 당해낼 수 없지. 늦게까지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는 사교성이면 쉽게 쓰러지진 않을 사람. 연말연시 모임들이 많을 때다. 연말에 한번쯤은 꼭 만나 맑은 술 ..
호박씨는 심을 땐 구덩이에 쇠똥거름을 담뿍 준다. 발아 시기에는 해충을 이겨내도록 잎사귀에 재를 툭툭 뿌려주지. 가을이면 샛노란 호박마차를 탄 신데렐라가 어김없이 찾아온다오. ‘검은 재를 뒤집어쓴 소녀’란 뜻의 신데렐라. 호박공주라고 불러도 되겠다. “신데렐라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요. 계모와 언니들에게 구박을 받았더래요. 샤바 샤바 아이샤바 불쌍한 신데렐라. 샤바 샤바 아이샤바 왕자님은 언제 만날까.” 아이들은 신데렐라 동요를 부르며 고무줄놀이를 즐긴다. 계모와 언니들은 착한 신데렐라를 왜 괴롭혔을까. ‘구박을 받았더래요, 불쌍한 신데렐라’가 아니라 ‘사랑을 받았더래요, 행복한 신데렐라’… 이런 스토리였다면 얼마나 좋아. 눈 내리는 밤, 노란 호박죽을 끓여먹으면 노란 보름달처럼 속이 다스워질 거야. 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