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대 중반, 어느 외국계 기업에서 인턴십을 할 때였다. 업무 절차 중 출근이 가장 어려운 과업이었다. 마치 속 자폐인 주인공이 회전문을 통과하기 위해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고 신중을 기하듯, 지체장애인인 나는 심호흡 끝에 몇 가지 무거운 문을 밀 수 있어야만 사무실 내 착석이 가능했다. 통로 사이 무거운 문을 만날 때면 목발을 겨드랑이로 쥐고 힘껏 손바닥으로 문을 밀어보았지만, 문은 흔들리는 시계추처럼 앞뒤로 몇 번 휘청거리다가 다시 닫혔다. 지체장애인이 쉽게 지날 수 있는 자동문으로 교체하거나 가벼운 문으로 바꾸는 방안을 알아봤지만 모두 실현 불가능했다. 소방법상 문제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건물의 임대차 계약에도 문제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회사는 타인의 도움에 의존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문..
최근 페북, 인스타의 개인정보이용 동의 강요가 논란이다. 개인정보를 넘기는 걸 넘어서 수천만명의 데이터를 가진 플랫폼기업을 통째로 넘긴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카카오모빌리티 이야기다. 카카오모빌리티는 내비게이션, 택시, 대리운전, 퀵 등 광범위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카카오T 가입자는 3000만명, 관련 종사자는 2만명에 달한다. 기업가치는 매각과정에서 8조5000억원으로 평가받는다. 엄청난 성장의 원동력은 서비스를 이용하는 국민과 노동자가 제공한 데이터였다. 카카오모빌리티를 인수하려는 회사는 MBK이다. 기업을 사서 구조조정 후 되팔아 이윤을 얻는 사모펀드다. 우리의 데이터도 사모펀드로 넘어간다. 사모펀드가 가지게 될 데이터는 누구의 것인가? 플랫폼이 만든 앱이라는 기계는 데이터라는 기름이 끊임없이 공..
목격되지 않기로 결정한 사람이 있다. 목격될 때마다 폭력을 당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입을 맞추려는 모습을 본 사람은 고개를 돌려 침을 뱉었다. 몰래 따라와 뒤통수를 때렸다. ‘더러운 년들’이라며 지팡이로 다리를 쳤다. 화가 났다. 하지만 그보다 무서웠다. 왜 그렇게까지 악의를 갖는 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좁아지기로 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맘 편히 껴안을 수 있는 곳에서 숨어있기로 했다. 비밀 첩보원처럼 들키지 않기로 했다. 폐쇄적이고 안전한 곳에 머물기로 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진짜 삶은 사랑하는 사람과 나누면 되니까. 그거면 충분하니까. 그런 그에게도 한 가지 소망이 있었다. 바다에서 알몸으로 수영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과 후미진 폐촌의 바닷가로 놀러갔다...
최근 페이스북의 타임라인은 몇년 전에 비해 광고의 비율이 무척 늘었다. 광고의 방식도 기묘해졌다. 실제 제품의 판매 회사들이 직접 광고 제품을 게시하는 방식이 아니다. 오늘 이야기하려는 것은 마치 자신이 광고가 아닌 것처럼 위장한 플랫폼의 광고 방식에 대한 것이다. 이런 광고는 아래의 과정을 통해 진행된다. 우선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페이지가 노골적으로 감정을 끌어올리는 글 제목과 내용을 미리보기로 제공하며 내 타임라인에 노출된다. 그러한 글들은 예를 들자면 ‘바람난 애인이 이때까지 데이트한 비용을 더치페이하자고 2년치 가계부를 1000원 단위까지 기록해 보냈네요’ 같은 방식이다. 쉽게 분노할 대상이 있고, 답답해하는 글쓴이의 마음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으며, 그래서 분노의 대상에게 속 시원한 응징..
계곡물에 발을 담그자 천국이 펼쳐졌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맺히고 짜증이 나는 요즘 날씨에 절대 느낄 수 없을 것 같은 한기였다. 입술이 파랗게 변할 정도로 물이 찼다. 한 5분쯤 발을 담그고 있었을까. 천국을 느끼는 것도 잠시, 지인들과 나는 다시 차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데려온 강아지 때문이었다. 동반한 반려견을 보고 황급히 입구에서부터 우리를 따라온 산림청 직원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반려견 출입이 금지된 곳이니, 나가 달라고. 아니, 강아지보다 사람이 자연에는 더 해가 될 텐데! 순간적으로 화가 났지만, 이미 정해진 자연휴양림의 정책에 반기를 들 정도는 아니었다. 반려견을 키우지 않는 사람의 불편함을 이해한다. 수많은 반려동물 관련 사고가 어떻게 일어났는지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땀 흘리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어떨 땐 숨을 헉헉 쉬어대며 자기 몸을 관리하는 모습에 대단함을 느끼다가도, 제한 없이 체육관에 입장 가능한 당연함에 질투가 났다. 땀을 쫙 빼면 스스로 살아있음을 느낀다며 환희에 찬 표정을 짓는 연예인의 기분을 이해하고 싶었다. 숨을 헉헉대며 유산소운동을 할 체육관이 장애인에게도 있나 궁금했다. 몇 년 전 처음 체육관에 갈 때 용기가 필요했다. 카운터에서 ‘헬스 등록 좀 하려는데요’라고 한마디 해보려고 수많은 어투를 사전에 연습했다. 어눌하게 말해서 거절될까, 자신 없게 말해서 거절될까, 흥분되게 말해서 거절될까. 비뚤어진 몸을 바꿀 수는 없으니 곧은 목소리라도 가져보리라 몇 번을 흉내냈다. 별 소용이 없었다. 체육관 측은 샤워실 안전 문제로, 시설 미비 문제로 등록을 친..
“고용보험은 강제로 플랫폼 라이더에게 징수해 놓고, 그걸 이유로 재난지원금을 지급하지 않는 건 앞뒤가 안 맞는 졸속행정입니다.” 라이더유니온 커뮤니티에 올라온 조합원의 절규다. 배달 노동자들은 1월1일부터 고용보험이 적용됐는데, 고용보험가입자들에겐 특고 프리랜서 6차 재난지원금을 지원해주지 않아 일부 노동자들이 분통을 터트렸다. 근로기준법상 근로자 고용보험과 특고 프리랜서가 고용보험이 다르다는 걸 몰라서 발생한 해프닝이다. 배달할 때마다 배달앱에 ‘고용보험료’라는 이름으로 보험료가 차감되는 걸 본 배달노동자가 특고 고용보험이 따로 있다는 걸 어떻게 알겠는가. 신규 신청자는 6월23일부터 신청이 가능한데, 너무 빨리 신청해 ‘신청대상자가 아닙니다’라는 안내를 받고 고용보험 때문에 탈락했다고 믿는 사람까지 ..
어떤 시집에 관해서는 말을 꺼내기까지 오래 걸린다. 너무 좋아서, 너무 어려워서, 너무 이상해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그저 깊숙한 무언가를 내주지 않고서는 도저히 입을 떼기 어렵게 만드는 종류의 시집도 있기 때문이다. 김혜순 시인의 (문학과지성사·2022)도 그런 시집이다. 1979년 첫 시를 발표한 이래로 40여년 동안 거대한 문학적 일가를 이룬 김혜순이라는 이름이 지닌 압도감 때문만이 아니라, 이 시집이 명백히 엄마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인 딸의 고통스러운 기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시집 전체를 아름답고 풍부하게 감싸는 행성의 은유를 무너뜨리면서까지 굳이 제목을 바꾸어보게 된다. “엄마가 죽으면 딸은 누굴 돌지?” “죽음은 그냥 쾅 닫혀버리는 문이고, 그 문 뒤에 뭐가 있는지 우리는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