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 사상은 잘못됐어. 반대하는 의견들을 무시하잖아!” 며칠 전 지역 행사에서 들었던 분노에 찬 발언이다. 토론회가 한창 진행 중이었는데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참석자가 느닷없이 소리를 질렀다. 그는 이 분노를 표출하기 전까지 자신을 보라는 듯 손을 높이 들고 있었다. 당시 토론회는 혐오와 차별 없는 사회를 위한 연대와 인권교육을 주제로 여러 논의를 이어가고 있었다. 발제자와 토론자의 발언이 끝난 뒤 이어지는 질문 시간에 그는 당신들이 반대 의견을 무시한다고 울분을 터트리며 격앙을 이어갔다. 끝을 예상할 수 없는 뜨겁고 거친 발언이 이어질수록, 청중과 참석자는 얼어붙고 초조해졌다. 그는 줄곧 동성애 반대를 주창하며 말을 이어갔다. 토론회 주제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자신의 이야기들이었다. 얼마 전 열린 ..
두고두고 후회하는 발언이 있다. 대학 고학년 때 처음으로 본인상 부고를 받았다. 얼굴도 본 적 없는 학과 후배였다. ‘본인상’이라는 단어가 생소해 주변에 물었다. “이거, 그 말 맞지?” 한 질문에 여러 답이 따라왔다. 그 친구는 군에 복무 중이었다고 했다. 평소 내성적인 성격으로, 휴가를 나왔으나 결국 다시 군으로 돌아가지 않을 선택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며칠 뒤 학과 밖의 누군가가 이에 대해 물었다. 나도 모르게 내뱉은 문장은 “원래 성격이 좀 그랬대. 적응을 못했다나 봐”라는 말이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내 발언을 지적해 준 친구에게 아직도 감사한다. 억압적인 군 조직 문화는 개선되어야 마땅하다. 사건을 설명하는 말로 가장 먼저 피해자의 ‘내성적인 성격’을 들어선 안 됐다. 설사 그런 성격을 ..
출장 때문에 막차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했다. 택시 없는 택시 정류장엔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고 휴대전화만 바라봤다. ‘예약’ 글자를 연두색 빛깔로 내뿜는 택시들이 하나둘 도착했고, 줄을 선 사람이 아니라 호출에 성공한 사람이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갔다. 앱을 켜고 온라인 택시정류장에 접속해 손을 흔들어 봤지만, 어떤 택시도 잡히지 않았다. 비싼 택시를 호출할까 했더니, KTX와 비슷한 요금에 플랫폼을 빠져나왔다. 한적한 도로를 걷고 또 걷다가, 30분 만에 지나가는‘빈차’를 온몸을 흔들어 잡았다. 뒷좌석에 피곤한 몸을 누이니 노곤해지면서 택시가 참 야속하다는 생각이 불쑥 올라왔다. 그 순간 운전석에 앉은 노동자의 희끗희끗한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이 택시는 언제 집에 들어갈까...
“한마디로 나 자신의 인류학자가 될 것.”() 아니 에르노의 문장을 빌려 그녀의 문학을 소개하라면 이렇게 요약될 수 있을까. 감정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스스로를 임상 해부하듯 냉철하게 분석하는 치열한 글쓰기. 디디에 에리봉의 말을 빌리면 “나를 발명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먼저 나를 분리”해낸 귀한 결실이다. 그 문학적 자기 발명을 높이 산 한림원은 며칠 전 그녀에게 노벨 문학상을 수여하는 이유로 ‘사적인 기억의 근원을 파헤치는 용기와 예리함’을 꼽았다. 임신중단이나 기혼 남성과의 사랑 등 실제 경험을 다룬 자전적 이야기라는 사실과 함께 자주 인용되는 이 문장도 에르노가 여성의 욕망을 여과없이 드러냈다는 이해를 덧대왔다. “이런 이야기를 숨김없이 털어놓는 것을 나는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단호..
8월26일, 미국 ‘콜로라도 주립 박람회 미술대회’의 디지털아트 부문에서 우승을 차지한 제이슨 M 앨런은 최근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인공지능이 이겼고, 인간이 패배했다”며 수상소감을 밝혔다. 그가 미술대회에 출품한 작품이 AI 프로그램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인공지능의 제작물이 대회에서 수상하는 사건 자체는 낯설거나 새롭지 않다. 2016년, 일본의 문학상인 ‘호시 신이치’ 상에서 사토 사토시 교수가 만든 인공지능의 소설이 1차 예심을 통과한 적 있었다. 인공지능이 만든 작품만으로 공모전을 진행한 사례도 존재한다. 2018년 KT와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총상금 1억원을 내걸고 국내에서 처음으로 인공지능이 만든 웹소설 공모전을 열기도 하였다. 이렇듯 예술과 수많은 공모전에선 AI의 참여가 계속되어왔다..
디스토피아 하면 떠오르는 장면은 빽빽이 들어찬 높은 건물 사이로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도시의 모습이다. 영화 가 내게 그런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는 이미 망가져 버린 지구의 전경을 비춘다. 망가진 기후로 인해 해가 들지 않는 도시에는 언제나 산성비가 내린다. 빗물과 도시 오물이 뒤섞여 흐르는 질척한 땅바닥. 도시 하층민은 그런 질척한 땅 위에서 건강에 좋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산성비를 맞으며 살아간다. 이 글을 써내려가는 지금, 창밖에도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맑다가도 갑자기 내리는 비 때문에 신발과 바지가 젖은 채 들어온 게 여러 번, 통상의 날씨를 피해 비를 뿌리는 범인은 ‘기후위기’다. 1980년대의 상상력이 그린 망가진 기후 속 하층민이 질척한 땅바닥 위의 부랑자라면, 2022년에 마주하는 도시 ..
제주도에 살아온 20년간 이름이 다섯 번 바뀌었다. 장애인인 내 몸이 아플 때 한 번, 어른들께 손가락질당할 때 한 번, 길거리에서 모욕을 겪을 때 한 번,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할 때 한 번, 학교에 갈 수 없어 미래가 보이지 않을 때 한 번. 제주도에서 장애인 자녀를 키우며 고립감을 느꼈던 나의 친모는 삶이 한계에 봉착할 때마다 미성년 자녀의 이름을 동의도 구하지 않고 바꾸었다. 수차례의 개명은 지울 수 없는 큰 상처로 남아 있다. 장애인과 가족이 수도권 아닌 지방에서 사는 것은 버텨내기의 연속이었다. 장애인 부모는 ‘어쩌다 장애인을 키우게 됐냐’는 걱정인지 비난인지 구분하기 힘든 이웃의 말과 시선을 견뎌야 하고, ‘장애인을 키우는 데 너무 힘 빼지 말고 하나 더 낳아라’는 무책임한 응원을 감내해야만 ..
‘차별은 없다.’ 카카오모빌리티가 만든 ‘모빌리티 투명성 위원회’가 카카오택시 알고리즘검증 결과를 발표하면서 한 말이다. 택시노동자들은 카카오가 가맹택시에 콜을 몰아주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고, 공정거래위원회와 서울시에서 조사 중이다. 이에 대응해 카카오가 자체 위원회를 구성 검증에 나선 것이다. 위원회가 설명하는 알고리즘은 손님에게 가까운 택시노동자를 먼저 찾아낸 다음, 콜 수락률이 높은 택시노동자에게 배차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위원회는 “목적지 정보 표시 없이 자동 배차되는 가맹 기사와 목적지 정보를 확인할 수 있는 일반 기사 사이에 배차 수락률 차이가 발생하는데, 이는 일반 기사의 선택적인 콜 수락으로 생긴 차이로 차별이라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지만 키 170㎝ 이상인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