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뼈 빠지게 일하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두는 나라에 살고 있다. 푸코의 진단처럼 인구관리를 위해 누군가가 죽어야 하는 사회가 아니라, 천민적 자본의 증식을 위해 누군가가 생명을 수탈당해야 하는 사회이다. “위험의 외주화”라는 악담으로도 설명되지 않을 정도로 높은 산업재해율이나, 수시로 우리 일상을 위협하는 인재(人災)들은 ‘이미 권력을 압도해버린 시장’의 존재증명일 뿐이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이런 폭력에 대한 저항이다. 부실한 안전시설로 위험이 빤히 보이는 작업장으로 내모는 기업이나 경비절감을 위해 무리한 작업일정을 압박하는 사업주와 경영자들에 맞서, 정부를 향해 제발 죽게 내버려두지 말아달라고 외치는 우리들의 억장 받친 함성이다. 산업안전보건법같이 너무도 무력한 법령들을 제치고 제대로 된 나라를 ..
내가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인 김진숙을 처음 만난 것은 한국 민주화 투쟁에서 여성 노동자의 역할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할 때였다. 당시 민주노총 부산본부 교육국장이었던 그는 전투적인 노조 조직가이면서 탁월한 대중연설가로 잘 알려져 있었다. 그는 영국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외국인 학생에 불과했던 나의 인터뷰 요청에 바쁜 시간을 쪼개 흔쾌히 응해주었다. 나는 그때 느꼈던 그의 영혼과 카리스마, 무엇보다 그의 유머를 기억한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걸쳐 수없이 감옥을 드나들었던 전투적이고 노련한 노동운동가라는 명성과 대조적으로, 그는 인터뷰 내내 놀라울 정도로 명랑했고 활기찼다. 수감생활 중 겪었던 고문에 대한 기억, 자유의 몸이 된 것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TV를 통해 경악스럽게도 자신의 재수배..
컵라면은 바쁘고 입맛 없을 때 뜨거운 물만 부으면 언제 어디서든 한 끼의 식사로 변신하는 요긴한 패스트푸드이지만 미디어에서는 종종 고단한 삶을 상징하는 장치로 쓴다. 특히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청년이 편의점에서 컵라면과 삼각김밥을 먹는 장면이 나온다면 대사가 없어도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삶의 비극성을 드러낼 때도 라면이 동원된다. 비근한 사례로 인천의 주택 화재를 ‘라면형제’ 사건으로 명명하는 것이다. 화재 조사 결과 라면을 끓이다 불이 난 것은 아니라지만 이 사건은 앞으로도 ‘라면형제’ 사건으로 불릴 것이다. 2016년 5월28일 구의역 김모군. 이렇게만 말해도 숟가락이 올려져 있는 사발면 사진이 떠오르곤 한다. 19세 청년노동자 김군의 유품에서 나온 사발면은 그 어떤 말보다 힘이 있었다. 추모객들..
직장에서 쫓겨난 노동자가 원직복직하는 것이 평화라고 합니다. 일터의 평화가 생존의 기본이기 때문이겠죠. 스물한 살 젊고 앳된 용접공으로 입사했지만 노조활동으로 해고된 후 35년이 지난 지금껏 일터로 못 돌아간 노동자가 있습니다. 정년도 채 15일밖에 남지 않았으며 두 번의 암 수술을 받는 등 투병 중입니다. ‘소금꽃’, 김진숙입니다. 2011년 ‘희망버스’를 세상에 처음 나오게 한 주인공입니다. 한진중공업의 대규모 정리해고를 막으려고 공장 안 40m 크레인에서 309일간 고공농성을 하고 다섯 차례 희망버스 연대에 힘입어 동료 해고노동자 97명을 복직시켰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복직은 거론조차 안 했습니다. 2011년 6월11일 첫 희망버스 출발은 소박했습니다. 장기간 고공농성 중인 여성노동자에 대한 응원이..
‘김진숙’. 내가 그 이름을 알게 된 것은 2011년이다. 그녀를 떠올리면 ‘크레인 고공농성’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승리’가 연관 검색어처럼 자동으로 연상된다. 그녀가 309일의 고공농성을 마치고 내려왔을 때 나는 모든 문제가 해결될 줄 알았다. 지금 이 순간까지 그녀의 부당한 해고가 계속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아마 나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랬을 것이다. 최근 복직투쟁 과정에서 그녀에게 암이 재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마음이 너무 아프다. 35년, 아니 한진중공업에 입사했을 때부터, 그 긴 세월 동안 그녀가 겪었을 무수한 차별과 폭력, 그 순간들에 느꼈을 분노와 좌절…. 그것들이 그녀의 몸 어딘가에 쌓여 질병을 만들었을 것이라 생각하면 정말 안타깝고 슬프다. 한진중공업 최후의, 최장기 해고..
아이들의 눈이 웃고 있었다. 마스크를 썼어도 웃음이, 표정이 훤하게 보였다. 코로나19가 확산되면서 초등학생들을 직접 만날 기회가 없었다. 강연은 차일피일 미루다가 취소되었고, 동영상으로 대체되기도 했다. 그러니까 거의 1년 만에 초등학교 교실에서 아이들 앞에 선 것이다. 아이들이 모두 마스크를 쓴 채 투명한 가림막 앞에 앉아 있는 교실 풍경은 생경했지만, 아이들의 눈빛만은 여전히 반짝반짝 빛이 났다. 감사했다. 그들이 꼿꼿하게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이, 그들과 잠시라도 함께할 수 있는 것이 고마워서 허리가 절로 굽었다. 말로 떠드는 게 힘들어 매번 강연을 망설인 건 자만이었다. 쉽게 사람들을 만날 수 없고, 게다가 아이들을 마주하기도 어려운 시대를 지나다 보니 아이들을 만날 수 있는 순간이 더없이 소..
비대면이 뉴노멀이 된 시대이지만 감염병 등 재난상황에서 우리 사회의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필수노동자들이 있어야 한다. 필수노동자에는 택배기사·퀵서비스기사 등 특수형태근로종사자(특고)·플랫폼 노동자들이 많다. 그러나 특고를 위한 고용안전망은 열악한 상황이다. 일례로 지난 6월 신설한 긴급고용안정지원금의 수혜자를 분석해보니 특고·프리랜서의 월 소득이 코로나19 이전보다 약 69%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으나, 이분들은 고용보험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 특고들이 적기에 필요한 지원을 받게 하기 위해선 긴급고용안정지원금과 같은 일회적 지원이 아니라, 고용보험의 범위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 주요 선진국들도 노무 제공 형태 다양화에 따라 고용보험의 적용 대상을 확대하는 추세다. 프랑스·스웨덴·핀란드 등은 자영업자를 ..
앞으로 한 달 뒤 11월13일, 전태일 열사가 분신, 산화한 지 50년이 되는 날을 맞는다. 전태일재단에서는 그의 50주기를 앞두고 한 달 동안 다양한 기념행사들을 준비하고 있다. 전태일다리 주변에 기념동판을 추가로 제작하는 일을 비롯해 시민들과 함께 맞는 전태일 50주기를 만들기 위해 전국에서 그를 기념하는 사업들이 준비되고 있다. 50년 전에 산화한 그를 불러내는 것은 그만큼 지금의 노동 현실이 절박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오랜만에 고 조영래 변호사가 쓴 을 다시 꺼내 읽는다. 조 변호사는 “전태일이 평화시장의 근로조건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이래로 그 해결을 위해 택하려던 방법”이 네 가지가 있었다고 소개한다. 전태일은 재단사가 되어 어린 여공들(시다)을 자신의 위치에서 돌봐주려 했다. 그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