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최근 윤종숙의 전시를 흥미롭게 보았다. 작가의 그림은 마치 어린아이의 그림처럼 천진한 제스처로 자욱하다. 우선적인 인상이 그렇다. 그리다 만 그림, 마구잡이로 ‘쓱쓱’ 선을 그어놓은 낙서 같은 붓질, 화면에 물감을 ‘북북’ 칠해놓고 그 위로 산과 나무, 풀, 새 혹은 자연풍경의 일부가 연상되는 암시적인 흔적을 산개시켜놓은 듯하다. 얼핏 전통적인 동양의 산수화를 연상시키는 이미지 위에 추상표현주의풍의 과감하고 드라마틱한 붓질이 다소 난폭하게, 공격적으로 지나간다. 이른바 드로잉적 요소가 무척 강하게 자리하고 있다. 부드러운 파스텔 톤의 색조가 깔린 바닥면에 부분적으로, 얼핏얼핏 드러나는 형상과 그 형상을 지우고 칠해서 덮어나가는 붓질이 몇 겹의 공간을 만들고 있는 화면 위로 마치 동양의 서예를 연상시키는 선들이 상당히 회화적인 맛으로 조율되면서 화려하게 춤춘다. 선, 붓질은 그리기와 칠하기, 선적이면서도 면적인 역할을 동시에 겸하고 있으며 특정 산수화를 해체하고 붓질로 환원한 것도 같다. 이렇듯 붓질을 상당히 감각적으로 운용해나가면서 그 붓질이 만들어내는 감정과 표정의 여러 차이를 발생시키는 그림이다.

그림이란 결국 붓과 화면이 만나는 일이고 작가의 신체가 붓에 의탁해 자신의 마음과 정신을 풀어내는 것이다. 그림은 그렇게 그 작가만의 고유한 붓질의 향연, 특이한 붓질들의 신체화를 개별적으로 보여주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맛을 힘껏 즐긴다. 그것은 한 개인의 고유성과 헤아릴 수 없이 누적된 시간과 경험, 축적된 문화와 기억 등으로 무장되어 있다. 그러니 붓질의 독자성을 추적해 한 작가의 고유한 미의식을 엿보는 것이 또한 현대미술이기도 하다.

이처럼 작가의 감각과 개념을 신체화시키는 가장 우선적인 정보, 단위가 바로 붓질인 것이다. 또한 붓질은 화가가 사고하고 통찰한 모든 것들, 개념의 신체를 형성하는 것이고 그것은 화가의 무수한 행위들, 화면 위에서 보낸 수많은 시간과 그 시간 동안 일어난 모든 것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따라서 우리는 붓질을 단순히 어떤 대상의 재현에 종속되는 단위로 볼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풍성한 의미의 다발을 지니고 있는 독립적인 것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림이란 이렇듯 하나의 붓질에 담겨져 있다. 그러니 그림은 결국 붓질이기도 하다. 붓질을 잘 볼 수 있다면 그림을 분별하는 좋은 눈을 가질 수 있다.

전시장에 자리한 윤종숙의 그림에서 저 탄력적이고 감각적이며 무엇보다도 회화적 감수성을 잔뜩 거느리고 부유하는 붓질, 그 붓질이 자아내는 매력을 즐겁게 보았다. 상당한 내공이 깃든 붓질로서 작가의 신체성, 감각이 직접적으로 발화되는 흔적이기도 하다. 한편 이 그림은 추상과 구상이 충돌하고 선과 면, 바탕과 형상이 구분 없이 공존한다. 산의 능선과 산봉우리, 사찰이나 정자를 연상시키는 기와집, 수직으로 치솟는 나무, 새나 나비, 벌레들이 물감의 질료와 붓질 사이사이로 출몰한다.

작가의 의도는 관람자들에게 자신이 자연에서 보고 접했던 바로 그 느낌의 전달에 있어 보인다. 자신의 그림이 관람자 스스로 제각기 자신만의 추억, 기억, 감상의 폭을 넓히도록 해주는, 그러한 열린 상태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전통적인 산수화 감상 및 그런 그림들이 전달하고자 했던 체험과도 연결된다. 그것은 단지 그림 안에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림 밖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림을 보는 이들은 주어진 그림을 단서 삼아, 징검다리 삼아 각자의 기억을 더듬어 자연에서 접했던 체험, 기억을 더듬어 보라고 권유받는다. 작가는 자연의 어느 한순간이 안겨준 감각적인 상황을 고스란히 재현하는 동시에 모종의 활력과 기운을 포착하고자 한다. 그것은 작가의 몸과 감각, 기억에 의해 번안된 어느 한순간이고 그림 안에서만 기록된 모습이자 결국 작가의 신체와 지각으로 인해 가능한 풍경이다. 윤종숙은 이를 ‘마인드 랜드스케이프’라 부르고 있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미술평론가>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