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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미생> 신드롬이다. 드라마에 환호하고, 웹툰을 찾아 읽고, 책을 구매한다. <미생>은 2012년 1월20일 다음 만화속세상에서 연재를 시작해 2013년 7월19일 145수로 마무리되었다. 2012년 9월15일 1권이 출간되어 2013년 10월5일 9권으로 완간되었다.

2012~2013년 <미생>으로 뜨거웠는데, 2014년 하반기에 다시 <미생>이다. 한번 제 수명을 다한 콘텐츠가 다시 타오르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드라마의 역할도 크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마치 새롭게 생명을 얻은 유기체처럼, <미생>은 2014년을 사는 사람들에게 다가온다.

유기체 <미생>은 사람들의 공감을 먹고 산다. 매회 바로 내가 앉아 있을 것 같은 사무실을 보고, 때론 부질없어 보이는 노력을 보고, 답답해 옥상에 올라가는 상사의 모습을 보고, 자기만 잘난 줄 아는 신입사원의 모습을 보고, 그 안에서 나를 본다. 놀랍게도 어디에서도 보여주지 않았던, 미치도록 답답한 자질구레한 노동들이 그 안에 있다. 게다가 그 노동들은 대기업과 하청기업, 대기업의 정규직 상사와 부하직원, 비정규직 직원까지 다양한 층위를 갖고 있다. 가만히 보여주고, 동참하고, 공감하게 만든다. 그 노동을 본 우리는 생각한다. ‘이게 우리의 노동이야.’

양복을 입고, 빌딩에 출근해, 책상에 앉아 전화와 컴퓨터로 업무를 하는 이들에게 ‘노동’이라는 이름을 쉬 붙이지 않았다. 관리자라 부르거나, 고임금 화이트칼라라 부른다.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출근하는 그들의 일을 ‘노동’이라 부르기 꺼린다. 하지만 <미생>은 이곳에도 노동이 있다고 증언한다.

케이블채널 tvN의 금토극 ‘미생’ (출처 : 경향DB)


<미생>은 고졸 계약직 직원 장그래의 성공담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고도성장을 이끌어갔던 상사맨들의 활약상이나 재조명도 아니다. 겉으로는 쌀쌀맞게 대하지만 마음으로는 나를 도와주려는 직장 상사에 대한 고마움이나 달콤한 러브라인의 두근거림도 아니다. 놀랍게도 수많은 샐러리맨 만화, 직장 만화 심지어 드라마의 전형적 구조를 모두 버렸다.

1982년 연재를 시작한 일본만화 <시마과장>은 일본 대기업에 다니는 회사원 시마 고사쿠의 성공 스토리다. 만화는 <시마부장>, <시마이사>, <시마상무>, <시마전무>, <시마사장>, <시마회사>로 시리즈가 계속된다. 만화 안에 일본의 버블경제시대도 나오고, 잃어버린 10년도 나오고, 중국의 부상도 나오지만 중심은 잘난 시마의 영웅 서사다. 영웅 서사는 지친 독자들에게 짜릿한 쾌감을 주겠지만, 상처를 어루만져 주지는 않는다. 한국에도 직장만화가 있었다. 1980년대에는 <날자! 고도리>(김수정), 1990년대에는 <천하무적 홍대리>(홍윤표), <용하다 용해>(강주배)가 있었다. 이들 만화에는 웃음과 조금은 짠한 슬픔이 있었지만, 역시 구체적인 노동을 보여주지 않았다. 1990년대 허영만 작가는 <아스팔트 사나이>, <미스터 Q>, <세일즈맨> 같은 보다 전문적인 영역을 다룬 기업만화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허영만 작가의 기업만화도 고난을 극복하는 성공에 집중했다.

그 시절에는 직장의 웃음만으로도 좋았다. 성공 스토리는 속이 다 시원했다. 하지만 2014년은 다르다. 지금 우리는 나의 노동이 가치 있다고, 너는 잘하고 있다고, 격려를 받고 싶다. 격려라도 받지 않으면, 금방 무너질 것 같다. 뉴스는 자꾸 평온한 마음에 돌을 던진다. 수조원의 차익을 얻었다는 소식이나, 싱글세 같은 헛발질 말이다. 전자는 이미 사법적 판단이 끝난 상황이고, 후자는 정책 담당자의 농담이었다고 하지만, 무심히 지나치기에는 내가 보낸 오늘이 너무 힘겹다.

이 우울한 일상의 와중에 <미생>은 나의, 우리의 노동을 가까이 보여준다. 우리도 진심으로 <미생>에 호응한다. <미생>의 인기는, 나와 우리의 노동에 대해 스스로 보내는 격려다. 윤태호 작가는 말했다. “자연스럽게 1%가 아닌 99% 다수의 가치가 수면 위로 발현”되기를 바랐다고. 당신의 노동은 소중하다. 우리의 노동은 소중하다.


박인하 | 청강문화산업대 교수·만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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