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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역에서 누군가와 부딪칠 뻔했다. 조금만 늦었어도 꽤 세게 박치기를 할 상황이었다. 둘 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걸어오는 중이었기에 서로 머쓱하게 웃고 지나쳤다. 뒤돌아보니 그분은 다시 스마트폰에 고개를 박고 있다. 요새 워낙 자주 있는 일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는 건 사실이다. “에이! 저놈의 폰을 다 없애든지 해야지!” 역정을 내면서 사람들을 밀치며 걸어가는 할아버지를 본 적도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쉽게 고쳐지지는 않는다. 길을 걷다가 가로등에 머리를 박을 뻔한 적도 있으니까. 운전을 하다보면 횡단보도를 건너면서도 화면을 들여다보느라 고개를 푹 숙이고 걸어가는 사람들이 많은데 내가 다 아슬아슬하다. 이어폰까지 끼고 있으면 경적을 울려도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사실 나는 걷기를 썩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는데 그 생각이 바뀐 계기가 있었다. 몇 해 전 방문한 일본 요코하마에서의 경험 덕이다. 요코하마의 인도는 놀랄 정도로 넓고 쾌적했다. 차도보다 인도가 넓다니!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풍경이었다. 사람들은 넓은 인도를 자유롭게 오갔고, 자전거도 막힘없이 달렸다. 워낙 인도가 넓다보니 옹색하게 자전거 전용도로를 굳이 따로 만들 필요가 없었다. 널찍한 인도를 걷는 기분은 색달랐다. 도시에서 걷는다는 게 힘든 것만은 아니라는 걸 그때 느꼈다. 여기라면 누군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느라 천천히 걸어다녀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이것저것 구경하며 걷는 기분은 꽤 괜찮았고, 상쾌해지기까지 했다. 누군가와 부딪칠 걱정 없이 종종걸음으로 걷지 않아도 되니 가슴이 쭉 펴지는 것은 물론 왠지 느긋하고 여유로워졌다. 인도를 넓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니 놀라웠다. 인도 바닥마다 도시의 역사를 그려넣은 부조들이 새겨져 있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물론 요코하마의 넓은 인도에는 2차 세계대전 이후에 폐허가 된 도시를 아예 처음부터 다시 설계할 수밖에 없었던 아픈 역사가 숨어 있긴 하다. 하지만 신도시마저 인도보다 도로를 훨씬 넓게 설계하는 우리에 비하면 신선하기 그지없었다.

우리의 길은 어떤가? 가뜩이나 좁은 길에 내놓고 쌓아둔 물건들과 입간판들, 모아놓은 쓰레기봉투와 음식점 앞에 버젓이 놓여 있는 음식물쓰레기통, 인도를 침범해 아무렇게나 대놓은 차들, 노점상까지 합세해 제대로 걷기 자체가 불가능하다. 요새는 건물 지하와 연결된 주차장이 많아져 주차장에서 나오는 차까지 신경쓰며 걸어야 하는 지경이다. 가로수가 있는 좁은 길의 경우 두 사람만 지나가도 좁은 인도가 태반이다. 이러니 내가 천천히 걷고 싶어도 뒤에서 보폭을 빨리해 오는 사람들이 스쳐가며 나를 앞질러가거나 팔꿈치로 스치고 지나간다. 스치는 것은 양반이고 가방이나 팔꿈치로 치고 가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누군가와 천천히 걷고 있기라도 하면 뒤에서 사람들이 힐난하는 눈초리로 휙휙 지나간다. 인도가 아예 없고 차도만 있는 시골길보다는 낫다고 위로해야 하는 수준이다.

대학로를 따라 걷는 시민들 (출처 : 경향DB)


현재 우리의 도시가 걷기 좋은 곳은 결코 아니지만 그래도 걷기를 포기할 수는 없다. 다니구치 지로의 <우연한 산보>의 주인공의 말을 빌리자면 “TV나 잡지에 나온 곳을 찾아가는 산책은 산책이 아니다”. 이상적인 산책은 태평한 미아처럼 돌아다니는 “우아한 헛걸음”이기 때문이다. 모든 걷기가 다 산책일 필요는 없지만, 일상의 장소를 재발견하는 방법으로 짧은 여행을 떠나기에는 산책만 한 것이 없을 터다. 나의 경우 출근길이나 퇴근길 한 정거장 먼저 내려 걷는 짧은 산책이 가장 실행력이 높았다.

걷기 좋은 계절인 가을도 이제 끝나간다. “오늘은 우리 같이 걸어요 이 거리를, 사랑하는 그대와 단둘이 손잡고 알 수 없는 이 거리를 둘이 걸어요.” 버스커버스커의 노래처럼 걸을 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 혼자라도 상관없다. 말로만 하지 말고 나부터 짬을 내어 회사 근처의 공원이라도 좀 걸어야겠다. 색색의 낙엽이 떨어지기 시작한 그 오래된 공원을.


정지은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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