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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투(me too)’ 운동이 현상적으로는 구체적인 ‘실명 주체(개인)’를 호명해 비판하더라도, 누군가 개인을 징치(懲治)하기 위한 운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그런 지향만 있다고 오해한다면, 교통신호를 무시했거나 불법 유턴하다가 재수 없게 걸린 사람의 변명거리로 전락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와 반대로 ‘미투’ 운동에 대한 불편함을 이야기하며, 남성 또는 문단 전체가 그런 것이 아니란 식의 호도와 볼멘소리에도 반대한다. 이는 우리 사회의 성차별을 비롯한 구조적 모순과 일상의 민주주의가 체현되지 못하고 과거에 머무는 현실을 개인의 실수나 잘못으로 치부하는 오류를 범하기 때문이다.

연극연출가 이윤택씨가 19일 오전 서울 종로구 30스튜디오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상습 성폭력 의혹을 일부 시인하고 공개 사과한 뒤 자리를 떠나고 있다. 이상훈 선임기자

일부 예술가와 비평가들은 예술의 초월성에 주목한 나머지 예술이 역사와 지역의 맥락과 무관한 초월적이고 추상적인 가치인 것처럼 주장한다. 그러나 문학을 비롯해 모든 예술은 역사라는 시간성과 지역이라는 공간성 또는 장소성 등에 의해 상호침투적인 영향을 주고받는다. 따라서 이번 서지현 검사, 최영미 시인을 비롯한 수많은 여성을 통해 재점화된 ‘미투’ 운동(1년여 전부터 해시태그 운동이 있었다고 하지만, 우리 사회에 경고등이 점멸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래전의 일이었다)의 당사자들은 물론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 역시 별개의 세계 속에 외따로이 존재하는 돌출된 인물이나 사건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이면에 숨겨진 참모습을 드러낸 사건의 전위이자 전형이다.

다시 말해 이 사건은 ‘문단’이라는 특정한 세계의 구성원에게만 해당하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이라는 우리가 속한 시간과 공간, 세계의 문제이다. 다만 ‘문단, 예술계, 언론계, 의학계, 법조계, 교수사회’ 등등 우리가 전문성을 지닌 영역, 독특한 문화를 지닌 세계(世界)로 상정하는 공간에 몸담은 이들은 때로 우리 사회 전체, 외부세계의 변화와 다른 시간대를 살아간다. 우리가 하나의 ‘계(界)’라고 부르는 독특한 영역을 구축한 이들은 ‘그들만의 리그’에서 높은 담을 쌓고 변화를 거부하는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물론 예술가란 이 사회가 만들어낸 견고한 ‘사회적 언어와 매너’로 상징되는 지배질서에 저항하는 자들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 저항의 대상이 약자라면 그는 지배질서의 일부분이며, 지배질서를 강화하는 존재일 뿐이다. 우리가 자칫 착각하기 쉬운 것은 ‘미투’ 운동과 페미니즘이 지목하는 대상이 특정한 개인이자 사건인 동시에 특정한 것이 아니듯, ‘미투’ 운동의 고발자 역시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과 달리 그 자체가 개인이기만 한 것은 결코 아니다. 가해자에게 존중받을 업적과 가치가 있을 수 있듯, 고발자 역시 개인적 약점이나 결점을 가진다. 그러나 비판에 대한 반론이나 옹호를 위해 이것을 들추어 가며 가해자를 옹호하는 행위는 우리 사회의 모든 고발, 비판의 가능성을 전면적으로 무화(無化)하는 매우 위험한 일이다.

지금 ‘미투’ 운동을 통해 페미니즘과 젠더 감수성이 불러일으키는 불편함은 21세기가 된 지금까지도 ‘문학이란 이렇다, 이래야 한다. 예술가는 이렇다, 이래야 한다’는 과거의 낭만적 예술관, 전근대적 가치관만으로도 편하게 살 수 있었던 사람들에게 울리는 하나의 경종이다. 물론 루쉰의 비유대로 오늘 우리가 깨어난다 한들 강고한 기득권과 권력을 쥔 이들의 체제는 깨부술 수 없는 ‘무쇠로 된 방’일지 모르지만, 그대로 잠든 채 머문다면 ‘확실한 죽음’ 이외의 것은 남지 않을 것이다.

1987년 민주화가 있었지만, 그로부터 30년이 흐른 2017년 우리는 다시 촛불을 들었다. 페미니즘과 젠더감수성에 대한 요구와 목소리가 여성을 중심으로 퍼져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이에 호응하는 남성의 목소리도 점차 커진다. 그 까닭은 이것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당하고, 성희롱과 성폭력의 대상이 되는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세상에서 가장 약한 자, 소수자의 권리가 보장될 때, 그 사회의 나머지 사람들의 권리도 함께 보장받을 수 있다는 깨달음 때문이다.

<전성원 |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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