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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가 올해 정기국회 마지막 날까지 내년도 예산안에 합의하는 데 실패했다. 정부가 편성한 예산안 자동 부의제도가 포함된 국회선진화법이 2014년 시행된 이후 정기국회 내 예산안 처리를 못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국회의장이 15일 본회의를 마감시한으로 예산안 처리를 압박하고 있지만, 긍정적인 신호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예산의 내용과 규모를 두고 ‘새 정부 vs 전 정부’ 구도로 여야 감정의 골이 깊어지는 가운데, 법인세 같은 예산 부수법안에서도 도무지 접점이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대로라면 과거처럼 해를 넘겨 예산안이 처리되거나, 아예 사상 첫 준예산 편성이 현실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선진화’라는 별칭을 따로 붙여야 할 정도로 선진화법 이전의 국회는 그야말로 후진적이었다. 예산 처리 시점이 임박하면 이른바 1인 헌법기관이라는 국회의원들이 국회 맨바닥에 드러눕기 일쑤였고, 회의장 출입구에 쇠사슬이 내걸리기도 했다. 물론 법정시한이 지켜지는 일은 없었다.

결국 다수당의 날치기 시도와 소수당의 육탄 방어전이 한바탕 벌어지고 나서야, 시간에 쫓겨 대표선수끼리 담판을 짓는 밀실합의가 횡행했다. 급조된 3~4인의 소소위(소위원회의 소위원회)에서 공개토론도 없이 밀실에서 뚝딱 만들어낸 예산안은, 그 과정에서 문틈으로 전달된 수많은 쪽지예산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이 밀실 협의체의 일탈은 나날이 발전, 국회를 벗어나 한때 호텔방에서 예산을 주물럭대는 지경으로까지 타락했다.

개선됐을 뿐 선진화법 도입 이후에도 국회는 여전히 선진화되지 못했다. 2014년 이후 예산 처리 법정시한이 지켜진 것은 불과 2번뿐이었다. 처음에 하루, 이틀 늦어지던 예산안 처리는 이제는 일주일 정도는 가볍게 법정시한을 넘긴다.

거의 매년 빼먹지 않고 가동되던 소소위도 올해 어김없이 등장했다. 이번에 극적으로 여야가 예산안 합의에 성공한다 해도, 600조원이 넘는 예산안이 ‘2+2’ 같은 비공식 회의체에서 속기록도 없이 처리될 상황이다.

정부 예산안은 이미 두 달도 더 전에 국회에 제출됐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은 기획재정위원회 조세소위 위원장 자리를 놓고 한참을 다투다 예산안 법정시한에서 겨우 2주를 남기고서야 소위를 구성했다. 시간이 촉박해 협의체를 구성해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변명이 곤궁한 이유다. 감시자도 없이 굴러갈 소소위에는 올해도 어김없이 실세 국회의원들의 선심성 쪽지예산이 쏟아져 들어갈 게 뻔하다.

반쪽의 성공이긴 하지만 국회선진화법은 확실히 후진적이던 국회를 개선하는 데 일조했다. 하지만 선진화된 국회와 제도 안에서도 국회의원들의 행태는 과거와 달라지지 않았다. 제도는 고쳤는데 법 위반에 대한 페널티가 없기 때문이다. 일하지 않는 국회의원들을 일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국회가 아닌 국회의원 선진화법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법정시한을 넘기면 세비를 대폭 삭감하고, 정당보조금도 같은 비율로 감액해보면 어떨까. 

입법과 예산 심사가 본업인 국회가 이렇게 파업을 하는데 일단 ‘업무개시명령’부터 발동하고, 추후 형사고발이라도 할 수는 없는지 갑갑해진다.

<이호준 경제부 차장 hjlee@kyunghyang.com>

 

 

연재 | 기자칼럼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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