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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디셀러 SF소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이하 <안내서>)는 주인공이 ‘철거’ 위기에 놓인 지구를 탈출하는 내용으로 시작된다. 소설 속에서 태양계를 관통하는 ‘초공간 고속도로’ 건설을 위해 철거 위기에 놓인 지구는 주인공이 탈출한 직후 흔적도 없이 파괴된다.

소설 속 이야기지만 개발을 빙자한 무자비한 학살 아니냐는 반응이 나올 만한 내용이다. 만약 인류가 실제로 이런 일을 당하게 된다면 아마 “은하계 고속도로의 필요성이 아무리 높다고 해도 지구에 사는 생명 모두를, 지구 자체와 함께 없애면서까지 건설하는 것이 합당한 일이냐”며 분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소설 속에서 인류가 당한 ‘개발 명목의 학살’은 사실 인류가 문명을 이룬 이래 늘 벌여온 일이기도 하다. 굳이 인류사까지 거론하지 않더라도 ‘개발을 위한 철거’라는 이름의 희생은 인류가, 그리고 한국 사회가 자연에 강요해온 일이기도 하다.

게다가 한국에서 이미 벌어졌거나, 앞으로 벌어질 위험이 높은 ‘학살’ 중에는 필요하지 않음은 물론이고, 필요성이 높지 않은 개발사업도 다수 포함돼 있다. 4대강, 새만금, 설악산 케이블카, 지리산 산악열차, 가덕도신공항, 흑산공항 등이 대표적 사례들이다. 이 사업들 가운데 “꼭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업은 단 하나도 없다. 모두 막대한 세금을 투입해 토목세력의 배만 불릴 위험이 높은 사업들뿐이다.

공항 건설이 추진되고 있는 수라갯벌 역시 마찬가지 사례다. 새만금신공항 예정지인 전북 군산 옥서면 남수라마을 인근 갯벌에서는 새만금 방조제가 생겨 해수 유통이 차단된 지 12년이 지난 지금도 법정보호종 50여종을 포함한 다양한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하지만 국토교통부는 이곳에 총 8077억원을 투입해 2029년 공항 문을 열 계획이다. 김포·김해·제주·대구공항을 제외한 전국 지방공항 10곳의 누적 손실이 4823억원에 달하고, 평균 활주로 활용률은 4.5%에 불과한 현실을 무시한 채, 필요도 없는 공항 개발을 무리하게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다양한 생물이 여전히 삶을 이어가고 있는 갯벌을 막대한 예산을 낭비하면서 파괴하려는 공항 건설계획은 <안내서>에서 은하계 고속도로를 만들기 위해 지구를 철거한 외계인들의 행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소설 속에서 인류가 제대로 항의조차 못한 채 멸망한 것과 수라갯벌의 뭇 생명들이 공항 건설 과정에서 맞이하게 될 운명 역시 같다. <안내서> 속 인류는 오랫동안 지구 철거에 대한 경고를 받고 있었지만 이를 인지하지 못한 탓에 멸망하고 말았다. 인류보다 철거 소식을 먼저 안 돌고래들이 경고를 보냈지만 인류는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고, 돌고래들은 인류를 남겨둔 채 지구를 탈출한다.

수라갯벌과 설악산, 가덕도 등에서 학살을 자행하려 하는 한국 사회에도 끊임없이 경고가 전달되고 있다. 생물종들의 멸종 속도가 급격히 빨라지는 것과 해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 기후위기의 징후들은 바로 자연이 인간에게 보내는 ‘이제는 학살을 멈춰야 할 때’라는 메시지다. 그 메시지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계속 학살을 벌일 때 우리의 미래는 소설 속 돌고래들의 경고를 알아채지 못한 인류가 맞은 운명과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김기범 정책사회부 차장 holjjak@kyunghyang.com>

 

 

연재 | 기자칼럼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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