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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문학, 특히 철학은 여유에서 비롯됐다. 춘추전국 시대, 살아남는 것 자체가 화두였던 상황에서 출발한 동양 철학은 그렇지도 않지만 고대 그리스에서 발원한 철학은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된 자유민 사이에서 시작됐다. 현상적인 것을 떠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근원을 묻는 것부터가 당장의 쓸모를 떠난 것이다. 인간은 어떻게 훌륭하게 살 수 있는가를 질문한 소크라테스도, 인간은 어떻게 탁월하게 살 수 있는가를 탐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도 갈급한 생존의 문제와 관계있는 것은 아니다.

인문학이 여유 있는 사람의 공부인 것은 지금도 여전한지 모른다. 얼마 전 이름만 대면 알 만한 한 철학자가 대학과 인문학의 현실을 이야기하다 말했다. “두 딸이 인문계 학과에 진학하겠다고 하는 것을 제가 절대 안 된다며 말렸습니다. 결국 두 딸은 법대에 진학했지요.” 그 학자가 딸의 인문계 학과 진학을 반대한 것은 인문학 동네에 정나미가 떨어져서다. 인문학을 공부하면 배가 고프다는 건 오래전 공부를 시작할 때부터 모르지 않았지만 이곳의 분위기가 이토록 문제가 있을 줄은 몰랐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얼마 전 한 공직 후보자가 일으킨 물의, 즉 제자 논문 표절이나 칼럼 대필 정도는 이 동네의 관행에 가깝다. 늘 보고 대하는 것이 그러니 그 후보자가 부끄럼도 모른 채 국회 청문회까지 간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다른 중견학자는 대학교수가 된 인문학자들을 “정상적인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외계인”이라고까지 말했다. 이들에 따르면 인문학자들이 이렇게 된 이유는 하나다. 먹을 것, 요컨대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대학교수가 되는 것 이외에는 할 일이 없다시피 하다 보니 이를 향한 이전투구가 벌어진다. 강자는 약자를 밟고 올라설 뿐, 여기서 정당함을 따질 여유는 없다.

지난해 12월 일본에서 출간된 만화 <자본론> 표지. 출간 며칠 만에 6000부가 팔렸다. _ 연합뉴스


2. 중요한 책과 재미있는 책은 다르다. 이를테면 판타지나 무협, 로맨스 같은 장르소설은 재미있는 경우는 많아도 중요한 책은 아닐 가능성이 크다. <삼국지>는 사람에 따라 중요하기도, 재미있기도 한 책이다. 그러면 ‘위편삼절(韋編三絶)’의 고사를 낳은 <주역>은 공자에게 어떤 책이었을까. 이 고사가 담긴 <사기(史記)>의 공자세가(孔子世家)에는 “공자가 늦게 역(易)을 좋아하며 역을 (무수히) 읽어 (죽간을 맨) 가죽끈이 세 번 끊어졌다”라고 적혀 있다. 위편삼절도 모자라 공자는 말했다고 한다. 만약 나에게 몇 년의 시간을 더 준다면 나는 역의 문사(文辭)와 의리(義理)에 모두 통달할 수 있을 것이다.

놀랍게도 공동체에서 가르치는 가난한 학자 중에도 그런 말을 하는 이가 드물지 않다. 대표적인 이가 <자본론>을 강의하는 학자다. 그는 어려서 책을 읽게 된 이래 수많은 책을 읽었지만 대학 시절 만난 <자본론>처럼 재미있는 책은 없었다고 털어놓는다. <자본론>을 읽으면서 인간과 사회, 세계에 대한 통찰을 얻은 것 못지않게 이 책이 “다른 어떤 책보다 재미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두 딸의 인문학과 진학을 한사코 말렸다는 그 학자도 마찬가지다. 타의에 의해 대학교수 생활을 접고 번역과 집필에 학자로서의 삶을 건 그는 자신이 연구하고 있는 사상가의 난해한 책이 “그리 오묘하고 맛있을 수가 없다”고 말한다. 딸에게 인문학과 대신 법과 진학을 강권하긴 했지만 학문하는 깊이와 감동으로 철학만 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먹을 것이 없어도 철학은 예나 지금이나 학문의 여왕이다. 그가 자신의 일을 회의하면서도 철학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철학만큼 재미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3. 학자가 아니어도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은 많다. 이를테면 불교학자가 된 김윤수 변호사다. 저서와 번역서를 수십권이나 낸 그의 학문 생산은 일급학자를 능가한다. 40대 후반에 공부를 시작한 그에게 공부가 재미가 없었으면 이 일이 가능했을까. 그는 “판사, 변호사란 직업은 공부를 뒷받침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공동체에도 이를 닮은 사람은 흔하다. 학생이나 연구자, 편집자처럼 자신의 일에 인문학이 필요해 공동체를 찾는 사람도 많지만 상당수는 자신의 일과 상관없는 사람들이다. 평범한 중산층이 대부분이지만 가난한 공동체에 어울리지 않게 고급 외제차를 탄 사람이나 대기업 CEO도 없지 않다.

이들이 밝히는, 인문학 공부의 이유는 “재미있으니까”이다. 난해하기 이를 데 없는 철학서와 대결하는 것이 골프보다, 술자리보다 재미있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공부는 쓸모와 무관하다. 목적 자체다. 돈과 권력 같은 목표만 향해 숨 가쁘게 달려온 이들이 무목적의 목적에서 숨 쉴 틈을 찾는 것일까. 어디를 둘러봐도 보이는 건 절망뿐인 땅에서, 공부를 하며 희망의 기운을 읽어내는 것일까. 대학과 교수들의 여러 문제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인문학이 이 정도나마 살아있는 것은 직업과는 무관한 이들의 쓸모없는 공부에 대한 재미 덕인지도 모른다.


김종락 |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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