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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이다. 이 도시에 들른 김에 다시 브란덴부르크 문을 찾았다. 도쿄에 머무는 지인의 SNS 게시글을 읽고 나서다. 글 제목은 ‘일본은 여전히 패전 중’. 일본 서점가에 전시된 수많은 혐한국, 혐중국 서적을 보고 든 생각이라고 했다. 그는 이어 이렇게 적었다. 잃어버린 20년, 일본이 잃어버린 건 세계가 부러워하던 특유의 매뉴얼 뿐 아니다. 이제 이들은 그저 부지런하고 성실하면서, 천박한 장삿꾼일 뿐이다. 일본은 패전에서 벗어난 게 아니라 아직도 패전중이다…. 댓글에는 누군가가 일본 도심 서점의 핵심 코너를 이런 책들로 가득 채운 사진도 올렸다.

일본의 현재가 서점에서 읽힌다면 독일의 현재는 브란덴부르크 문에 투영된다. 이 문 앞은 세월호를 기억하는 베를린 교민들이 매월 셋째 토요일, 추모집회를 여는 곳이기도 하다. 지난 토요일, 집회에 참석한 이들은 세월호 참사로 세상을 떠난 이들을 상징하는 294켤레의 운동화를 모아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 전시, 베를린 시민과 관광객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세월호 추모 집회가 아니더라도 의회와 총리 집무실, 미국, 영국, 러시아 대사관 등이 밀집한 브란덴부르크 문 주변은 독일의 중심이면서 전후 반성과 참회의 심장부다. 동서독 분단과 통독의 상징이기도 한 문 앞에는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죄과가 사진으로 상설 전시되고 있다. 나치가 폴란드인과 유대인을 박해하거나 학살하는 사진들이다. 문 안 쪽으로 조금 더 간 운터덴린덴 거리의 한 건물에는 바르샤바의 전쟁 희생자 비석 앞에 무릎을 꿇은 빌리 브란트 전 총리의 사진이 내걸린 브란트 기념관이 나온다. 나치가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를 벌였던 브란덴부르크 문 밖 6.17거리 중심에는 소련 전승 기념탑이 넓게 자리 잡고 있다. 이 문에서 남서쪽으로 몇 블록 걸어가면 다니엘 리베스킨트의 실험적인 건축물로 이름난 유대 박물관이 나온다.

독일이 자신의 심장부에서 이렇게 오래도록 스스로 죄과를 공개하며 성찰하고 반성하게 하는 저력은 무엇일까. 내친 김에 유대 박물관까지 찾았다. 리베스킨트를 세계적인 건축가로 거듭나게 한 건축 못지않게 박물관에서 관심을 끈 것은 관람객들의 면면이었다. 이곳을 찾은 이들이 초등생이나 중고생 단체 관람객이나 관광객이 아니었던 것이다. 평일 오후인데도 중고생에서 청년, 대학생, 중년, 노년들이 고루 박물관을 채우고 있었다. 한 무리의 청년들은 지하 복도 교차로에서 진지한 표정으로 즉석 토론을 벌였다. 중고생을 데리고 온 교사는 나치의 만행이 담긴 사진 앞에서 당시 사진 속의 정황을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알려지다시피 독일의 대학 진학률은 한국보다 낮다. 철학이나 역사학, 사회학을 비롯한 인문사회학은 역사와 전통과 역량을 자랑하지만, 이들 학과가 한국만큼 많은 것도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인문학이 인문계 학과의 전유물이 아니라 상경계, 이공계, 문화예술계 학과 가릴 것 없이 모두 공부한다는 것이다. 비판과 성찰을 핵으로 하는 인문학의 생활화, 내가 유대 박물관에서 만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가져오는 것은 장기적으로 국가와 사회, 그리고 시민들 개개인의 삶의 변화다.

브란덴부르크문에서 인문학을 생각하다 (출처 : 경향DB)


독일이 패전에서 벗어나 국제 사회의 신뢰를 얻고 통독까지 일구어낸 상황은 차치하자. 최근 극명한 사례는 원전을 둘러싼 독일과 일본의 태도 차이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뒤 이 사고와 직접 관련도 없는 독일이 핵에너지 제로를 선언하고 재생 에너지로 방향을 튼 반면 일본은 원자력 재가동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아베 정권의 에너지 기본계획에서 원자력은 여전히 가장 중요한 에너지원일 뿐 아니라, 일본은 아랍에미리트연합, 베트남, 터키 등지에 원자로 수출을 강행하고 있다. 문제는, 그럼에도 일본인들이 아베를 지지한다는 것이다. 이미 묵시론적인 재앙을 경험하고 있는 일본, 일본인은 왜 자신을 돌아보지 못할까. 독일이 패전에서 벗어나게 한 힘도 인문학이고, 일본이 여전히 패전중인 것도 시민 사이에서 인문학이 무너진 탓이 아닐까.

요 며칠 사이, 언론에서는 대학 인문학 관련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이들 학과 졸업생의 취업이 안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인’문계 졸업생은 ‘구’십 퍼센트(%)가 ‘론(논)’다는 의미의 ‘인구론’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고 한다. 말 그대로 인문계 취업 잔혹사다.

탈출법은 없는가. 분명한 것은 한국학연구재단이 여러 프로젝트를 던져주며 젊은 인문학자들을 비정규직 논문 생산기계로 만드는 건 대안이 아니라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중장기 대안이다. 인문학의 저변을 확대해 이것이 대다수 사회 구성원의 일상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는 초·중·고생은 물론이고 상경계건, 법학과건, 이공계, 문화예술 학과건 관계없이 인문학을 공부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시민 다수가 비판과 성찰을 핵으로 하는 인문학을 놓지 않게 하는 것을 뜻한다. 인문학이 인문계 학과나 인문학자만이 아닌, 우리 사회 모두를 위한 학문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인문학이 위기면 나라와 시민의 삶이 위험해진다.


김종락 |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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