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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고 나서야 시작되는 영화가 있다. 엔딩 크레디트가 끝난 다음 마음속에서 계속 되감아 재생시키면서 의미를 묻고 해석하게 만드는 영화. <헤어질 결심>이 그런 영화다.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은 형사 해준과 살인 용의자 서래가 서로에게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드는 이야기다. 이 사랑의 외형을 보고 형사와 살인 용의자의 ‘금지된 사랑’이라는 클리셰, 혹은 ‘불륜’으로 범박하게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박찬욱은 클리셰를 넘어 해준과 서래의 사랑을 관객에게 설득시키는 데 성공했다.
해준(박해일)은 성실하고 능력 있는 형사다. 동시에 살인사건이 불러오는 비극에 중독된 사람이기도 하다. 한 남자가 벼랑에서 떨어져 죽은 사건을 맡게 되고, 중국인 아내 송서래(탕웨이)가 나타난다. 서래 역시 이중적 인물이다. 살인 용의자인 동시에 가정폭력 피해자다. 남편은 서래의 몸에 이니셜을 새겨넣으며 ‘소유물’ 취급하고 학대했다. 그러나 서래는 ‘약한 피해자’나 ‘악한 가해자’의 위치에 머물지 않는다.
서래의 할아버지는 만주벌판에서 조선 독립운동을 펼친 인물이다. 서래는 중국에서 간호사였고, 간병인으로서 전문성을 보인다. 하지만 한국의 대우는 박해에 가까웠다.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일하는 남편과 결혼하지만 남편은 “중국으로 보내버린다”고 협박하며 그를 학대한다. 서래는 간병인으로 ‘업체’가 파견하는 곳을 다니며 일하는 불안정 노동자다. 인간답게 살 공간이 없던 한국에서 유일하게 원칙과 품위를 지키며 ‘환대’해준 이는 해준이었다.
해준은 잠복근무를 하며 서래를 감시한다. 용의자를 감시하는 형사의 시선은 해준 개인의 시선과 어느새 뒤섞인다. 공적인 자아와 사적인 자아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균열이 시작된다. 서래는 혐의를 벗은 즉시 해준을 떠나는 편이 안전했지만, 자신을 진심으로 대해준 해준에게 빠져든다. 해준이 서래를 위해 그의 자부심이던 일에 대한 원칙을 ‘붕괴’시키기로 마음먹었을 때, 서래는 사랑을 느낀다.
사랑은 모든 것을 낯설고 새롭게 만든다. 해준이 서래를 감시하는 행위는 서래를 ‘재발견’하게 만든다. 간병인으로서 전문적으로 일하는 모습, 죽은 새를 묻어주는 따스한 모습 등…. 이는 ‘용의자의 혐의없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랑에 빠진 자의 시선을 보여준다.
이를 극대화하는 것이 바로 서래의 ‘부족한 한국어’와 해준의 ‘쉽고 정확한 언어’다. 서툰 한국어 때문에 서래의 말은 낯설고도 새롭게 들린다. 해준이 정확한 발음으로 쉬운 단어를 선택해 말할 때도 마찬가지다. 익숙한 한국어가 ‘새로운 언어’로 다가온다. 이는 서로의 말 한마디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하는 사랑에 빠진 자의 태도이기도 하다. 해준이 “나는 완전히 붕괴되었어요”라고 말할 때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서래가 사전을 찾아 ‘붕괴’의 뜻이 “무너지고 깨어짐”이란 걸 알게 됐을 때, ‘붕괴’는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영화는 소리·장면·이야기 등 모든 것을 동원해 순도 높은 사랑의 이야기를 전한다. 강렬한 사랑의 감정은 살인자를 쫓는 형사에게도, 남편을 살해한 이민자에게도, 연쇄살인마에게도 찾아오는 불가항력의 감정이다. <헤어질 결심>은 현대에 드문 것이 되어버린 ‘지극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이영경 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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