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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생 자녀를 둔 한국 학부모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단어는 아마 ‘수포자’일 것이다. 수학을 포기한 자의 준말인 수포자는 곧 대학입시의 실패를 뜻하기 때문이다. 이달 초 들려온 허준이 프린스턴대 교수의 필즈상 수상 소식은 때아닌 수포자 논란을 야기했다.

논란은 기실 언론들이 시작했다. 수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필즈상 수상 소식이 타진된 날 오후부터 인터넷에는 “‘수포자’가 천재 수학자가 됐다”는 자극적인 제목들이 달린 기사들이 올라왔다. 그런데 내용을 보니 그 수포자의 스펙은 다소 특이했다. ‘어릴 적 수학에 큰 흥미가 없었지만 중3 때 과학고에 가볼까 생각했고, 시인을 꿈꿔 고교를 중퇴했으나 강남 유명 학원에서 입시 공부를 한 후 서울대 물리과를 한번에 합격했다…’라고. 이게 수포자라고? “수학 문제집 답지 보다가 혼나고, 경시대회 참가 포기하면 수포자 되는 거네요. 이 나라에선 수포자 되기도 어렵네요.” 기사의 허를 찌르는 촌철살인 댓글들이 줄지어 달렸다.

해당 기사들이 수학에 큰 흥미가 없었던 평범한 학생이라도 ‘노오력’하면 수학 천재가 될 수 있다는 자기계발의 의지를 독려하고 싶었다면 이는 선민의식에 가득 찬 언론의 오만함이다. 그게 아니라면 단지 어그로일 뿐이고. 뒤늦게 허준이 교수는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은 수포자가 아니었다고 해명했지만 그의 인터뷰 내용도 씁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수학이 문제가 아니라 한국 입시 구조가 문제”라며 농담을 섞어 “수학 스트레스는 내년부터 입시에 수학을 안 넣겠다고 하면 바로 해결될 것”이라고 밝혔다.

허 교수는 자신도 대학 시절 수학에 큰 재미를 느끼지 못했고, 서울대에서 우연히 듣게 된 필즈상 수상자 일본 히로나카 헤이스케 교수의 강의가 삶의 방향을 바꿨다고 밝힌 바 있다. 그에게 순수 수학의 재미를 느끼게 해준 이는 해외 교수였고, 수학적 천재성을 발휘한 시기도 미국 유학 이후부터였다. 그의 필즈상 수상에 한국 교육의 지분은 아주 적다고 봐도 무방하다.

현행 입시 구조상 수학을 뺄 경우 수포자는 감소할지라도 다른 과목들이 비상식적으로 어려워져 영포자(영어를 포기한 자), 국포자(국어를 포기한 자)가 속출할 것은 분명하다. 실제로 2019학년도 수능 언어영역에선 만유인력 법칙과 천문학을 다룬 난해한 과학지문이 출제돼 이게 과연 국어시험이냐는 소동이 벌어졌다. 재밌는 것은 당시 언어영역이 매우 어려울 것이라는 걸 입시전문가들은 정확히 예측했다는 점이다. 수능 영어의 평가기준이 절대평가로 바뀌면서 변별력 약화를 우려한 당국의 고육지책이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입시정책의 변화만으론 대학 서열화로 귀결되는 한국 교육의 병폐를 절대 해결할 수 없음을 교육 관료와 전문가들은 너무도 잘 안다. 가깝게는 대학이라는 고등교육의 혁신, 멀게는 노동시장의 개혁과 변화 없이는 입시 지옥에 대한 해결은 요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수시냐, 정시냐’만을 고민했던 문재인 정부에 이어 윤석열 정부도 교육에 큰 관심이 없다. 허 교수의 필즈상 수상이 백년지대계의 기틀을 고민할 터닝포인트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과연 이뤄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문주영 전국사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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