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박래용 디지털뉴스 편집장

독일의 게슈타포는 히틀러의 사찰기구였다. 정식 명칭은 비밀국가경찰(Geheime Staatspolizei)이다. 그 약어가 ‘게슈타포’이다. 게슈타포의 임무는 나치 정권의 반대세력을 적발하는 것이었다. 좌익·지식인·유대인·노동운동가·자유주의자·성직자들을 감시하고 체포하고 고문하고 처형했다. “게슈타포는 어디에나 있다.” 게슈타포 대장 하인리히 뮐러의 구호는 사람들을 숨죽이게 했다. 1933년부터 1945년까지 게슈타포 본부가 있는 베를린의 프린츠알브레히트슈트라세 8번지는 독일에서 가장 공포스러운 주소였다. 사람들은 “앞으로는 코에서 이빨을 뽑게 될 거야. 왜냐면 아무도 입을 벌리지 않을 테니까”라는 말을 주고받았다.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은 서울 종로구 창성동 117번지에 있다. 일명 ‘창성동 별관’이다. 2008년 7월 촛불시위 직후 1국 1과 7팀으로 신설됐다. 직원 42명 중 33명을 경찰·국세청·노동부·행정안전부 등에서 차출해왔다. 거개가 영포라인(경북 영일·포항) 아니면 TK(대구·경북) 출신이었다. 점검1팀장은 포항 구룡포 출신으로 10여년 동안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일한 보안경찰이었다. 지금 세상에 알려진 것은 점검1팀 소속 한 경찰이 미처 폐기하지 못했던 이동식 저장장치(USB) 1개에 담긴 문건의 일부일 뿐 나머지 팀의 다른 직원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는 아직 모른다.

히틀러는 ‘경찰’이란 이름이라도 붙였다. 한국에선 ‘공직윤리지원’이란 간판을 내걸고 정치인·언론인·기업인·교수·연예인·시민들의 뒤를 캐고 협박하고 자리에서 내쫓았다. 진보단체를 후원한 기업인에게는 “요즘 돈이 많으신가 봐요”라고 했고, 연예인에게는 “추모 콘서트 사회를 맡지 말라”고 했다.

 

박영선 의원과 이재화 변호사가 민간인 사찰과 관련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I 출처:경향DB

‘출생지는 서울이지만 부모 고향이 호남이라는 소문이 있음.’ ‘충성심이 담보되지 않은 호남 인사, 교체 바람직함.’ 게슈타포 산하 유대인과(課)가 유대인들을 몰살시키는 임무(final solution)를 수행했듯이, 이들은 출신 지역을 기준으로 공직자의 충성도를 재단하고 편을 갈랐다. 게슈타포 뺨치는 ‘이슈타포’다. 게슈타포가 독일 제국을 게르만족 혈통으로 재건설한다는 사명에서 활동했던 것처럼 ‘이슈타포’는 공직사회를 순수하고 순결한 지역 출신으로 재구성하려 했던 모양이다. 이 정부 내내 관가에서 “포항 출신이면 개도 출세한다” “영포 출신은 약에 쓰려 해도 없다”는 뒷말이 나돈 곡절을 이제 알 것 같다. 세계 경제규모 10위권이요, 입만 열면 국격을 외치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일이다.

게슈타포 책임자들은 종전(終戰) 이후 전범재판에서 처형됐다. 그러나 우리는? 불법사찰은 전 정권에서도 있었던 일이란다. 교통신호를 위반한 운전자가 “딴 사람도 위반했지 않느냐”고 대드는 건 봤지만, 민간인을 사찰하고 증거를 인멸하고 수사를 축소하고 돈뭉치로 입막음한 정권이 “딴 때도 하지 않았느냐”고 반박하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다. 법 위에 군림했던 5·6공 군사독재정권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나 윤석양 보안사 사찰 폭로가 터졌을 때 남 탓으로 돌리지 않았다. 게슈타포는 프로이센 정치경찰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나치조차 그런 변명은 하지 않았다. 그게 최소한의 염치요, 상식이기 때문이다.

이 정권은 집권 4년 동안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도 전 정권 타령이다. 남북 긴장, 먹통 정보, 측근 비리,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제주 해군기지 갈등, 경제 실정, 교육·복지정책 실패, 외교 난맥 어느 것 하나 ‘내 잘못이오’라고 손 들고 나오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노무현 없었으면 이명박 정부는 무엇으로 지탱됐을까 싶다. 그 동네 사람 중에서 경찰청장 조현오만 군계일학이 됐다. 그는 왜 “과거 정부에서도 112 부실 대응은 많이 있었던 일”이라며 버티지 않고 사퇴했는지 궁금하다. 피안(彼岸)과 차안(此岸)의 경계는 어디서부터인지 오묘할 뿐이다.

기실 ‘문건의 80% 노무현 정부 작성론’이란 점검1팀의 그 경찰이 과거 경찰청 감찰실에서 적법하게 취합한 문건을 한 USB 안에 담아 갖고 있던 것이다. 엄연히 다른 돈이지만 같은 주머니 안에 있었으니 다 훔친 돈일 것이란 얘기는 시장 야바위꾼이나 쓰는 수법이지, 청와대가 할 말은 아니다.

참으로 어이없지만 세상엔 나쁜 일만 있지는 않는 법. 어두운 쪽이 있으면 밝은 면도 함께 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새하얀 위장막을 벗어 던지고 제 발로 뛰쳐나온 몇몇의 숨겨진 진면목을 보게 된 것은 망외(望外)의 성과라 할 수 있다. 미래 권력을 꿈꾸는 박근혜는 흉포한 공권력의 횡포를 밝히는 대신 청와대 주장을 되풀이하며 2인3각의 한통속임을 보여줬다. 불법사찰 공화국의 본질을 외면하고 이쪽 저쪽 모두를 비판하며 우렁각시처럼 부지런히 물타기를 한 친여 보수언론도 ‘쌩얼’이 다 드러났다.

선거는 끝났다. ‘이슈타포’의 몸통을 찾아내 법대(法臺)에 세우는 일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최악의 국가범죄를 옹호하고 분칠한 한국판 신(新)나치들도 공범이다.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5/0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