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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 | 동화작가
지난주 금요일 밤, 텔레비전 리모컨을 들고서 잠시 고민에 빠졌다. 총선을 주제로 한 정치 토론 프로그램을 볼 것인가, 목소리 하나로 승부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을 볼 것인가. 결국 오디션 프로그램을 선택했다. 방송을 보고 있자니 과연 잘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그저 노래했다. 학벌도, 외모도, 지역도 따지지 않고 목청껏 노래했다. 성공의 확률을 계산하지도 현실적 가능성 앞에서 지레 무릎꿇지도 않았다. 그 단순하고도 순수한 열정에 홀려 방송국에 문자메시지를 보내 투표까지 했다. 투표의 기준은 간단명료했다. (내 마음을 움직인 목소리. 오디션 프로그램에 문자 투표를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나와 같을 것이다.) 내 마음을 움직인 목소리에 한 표를. 일등을 할 만한 후보를 고르지도, 탈락할 만한 후보는 피하지도 않고, 그저 내 마음 깊은 곳을 울린 누군가에게 진심어린 한 표를.
뒤늦게 정치 토론 프로그램으로 채널을 돌렸다. 역대 최다라는 20개 정당 가운데 달랑 4개의 정당에서 대표 주자들이 나와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복잡한 이야기가 많았지만, 단순하게 말하면 이런 것이었다.) 못 살겠다 갈아보자. 갈아봤자 별 수 없다. 1956년 당시 민주당의 장면과 자유당의 이승만이 치고받은 선거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50여년이 흐르는 동안 대한민국 선거판의 화두는 늘 이런 식이었다. ‘못 살겠다 갈아보자.’ ‘갈아봤자 별 수 없다.’
나는 사실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심정이다. 투표권을 가진 이래 쭉 그래왔다. 많은 국민이 그러할 것이다. 그러니 이승만과 박정희는 대통령직을 유지하기 위해 헌법을 유린하는 짓을 자행해야 했고, 1987년 대선 이후 엎치락뒤치락 정권의 주인이 바뀌어왔다. 그렇게 수십년이 흘렀는데도 상황은 여전하다. 그러니 이제는 정말 못 살겠다. 갈아보자. 탁구 구경을 하듯 여당과 거대 야당을 번갈아 쳐다보는 건 이제 그만. 선거에 참여하는 나의 자세부터 갈아보자. 선택의 기준과 방법을 바꾸어보자.
군 장병들이 투표를 하기 위해 선거공보물을 손에 들고 줄 서 있다. ㅣ 출처:경향DB
사지선다형 객관식 문제를 풀듯이, OX 퀴즈를 풀듯이, 후보나 정당을 고르는 것은 이제 정말 그만두어야 한다. 정치인들이 내놓은 방안을 골라잡기 이전에, 나를 돌아보아야 한다. 정치인들이 말하는 현실이 아니라 나의 현실을 돌아보아야 한다. 어느 당이 정권을 잡느냐가 아니라, 내가 지금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부모님이 편찮으시다는 말을 들으면 돈걱정에 가슴부터 덜컥 내려앉지 않는가. 평균수명 100세라는 소식에 막막한 한숨부터 나오지 않는가. 변변찮은 학벌로 먹고살며 자식들 사교육비 대느라 허리가 휘지 않는가. 대한해협 건너 일본의 방사능도 무서운데 지척의 핵발전소는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가. 정년도, 노후도 보장되지 않는 직장에서 불안에 떨고 있지 않는가. 벌면 얼마나 번다고 세금 따박따박 낼 때마다 돈 많은 자들은 과연 세금을 얼마나 낼까 하고 부아가 끓지 않는가.
그렇다면 요구하면 된다. 국가가 의료를 책임지라고, 노후를 책임지라고, 서울대 따위 없애 버리라고, 핵발전소는 당장에 문을 닫으라고, 비정규직을 철폐하라고, 부자는 세금을 더 내는 게 옳다고. 그런 요구에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는지 없는지를 왜 우리가 걱정을 하는가. 무상의료는 어렵지 않을까, 비정규직을 당장 모두 없애는 건 힘들지 않을까, 핵발전소 없이 과연 괜찮을까…. 왜 우리가 지레 걱정을 하는가. 쥐가 고양이 생각한다더니, 딱 그런 형국이다. 그런 걱정은 정치인들의 몫이다. 나랏일을 하겠다고 나선 자들의 의무다. 그들은 마땅히 국민의 요구를 받아안아야 하고, 그러지 못 했을 땐 설명하고 사과하고 더 노력해야 한다.
좀 더 당당해지자. 사표니 현실이니 따지지 말고 내가 바라는 것만을 생각하자. 그렇게 선택하고 기꺼이 한 표 던지자. 정치인의 논리가 아니라 나의 논리로, 정치인의 요구가 아니라 내 삶의 요구에 따라. 이렇게는 더 이상 못 살겠다. 갈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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