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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집 마당에

검은 구덩이 새로 패였다 


줄을 서서 배웅하던 나무들

말을 잃고 묵묵히 젖은 산그늘을 끌어 덮었다


담벼락에 나란히 기댄 의자들도

햇볕에 졸던 한쪽 귀를 벌써 어둠에 묻었다


굴뚝에서 거먼 길이

흘러나올 때

다리를 저는 그림자가 잠깐 다녀간 듯


우물가에 체인이 벗겨진 자전거,

녹슬어서


여기까지 온 것만도 애쓴 거라고

눈두덩이 부은 저녁이

길가에 한참 서 있다가 들어갔다.


염창권(1960~)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낮과 밤의 하루를 우리는 산다. 낮의 시간에 밤은 시작되고, 밤의 시간에 낮은 시작된다. 이 시는 낮의 시간이 밤의 시간으로 옮겨가는 풍경을 보여준다. 쓸쓸한 풍경이지만 애상(哀傷)으로 나아가지는 않았다. 검은 구덩이가 하나 새로 생겨난 것으로 보아 하루 동안 상처받은 일이 있었고, 또 고단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나무와 의자, 굴뚝, 자전거 등의 사물들이 있는, 해 지는 때의 정경이지만 이 사물들이 어떤 현상과 변화를 역동적으로 만들어내고 있다고 보는 시선이 새롭다.

우리는 바깥 풍경과 대상을 대할 때 인간 본위로 감각하고 판단하지만, 이 시는 사물과 대상이 스스로 세계에 능동적으로 작용하고 무언가를 일어나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인간뿐만 아니라 이 세계의 모든 존재들이 각각 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관계를 수평적으로 바라보면 화평하게 살게 될 것이다.

<문태준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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