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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알파고와 이세돌의 세기의 바둑대결에 대한 이야기가 폭발적이었다. 사람들은 ‘감정에 휘둘리지도 않고 체력적으로도 지치지 않는’ 바둑기계의 냉철함과 강인함을 인간 패인의 주요한 요인으로 거론하면서, 인간 한계의 중요한 지점인 것처럼 언급하기도 하고, 미래 인간이 갖추어야 할 ‘덕목’처럼 선망의 눈길을 보내기도 했다.
알파고와의 대결에 대한 무성한 말들 속에서 내가 떠올린 것은 오스트리아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소설 <체스 이야기>이다. 이 소설에는 두 명의 전혀 다른 유형이 등장한다. 한 명은 체스 세계챔피언이고, 또 다른 한 명은 나치에 의해 호텔 감방에 1년 가까이를 연금 당했던 시기에 우연히 ‘챔피언 체스교습서’를 얻어 완벽한 체스 정석을 통째로 머릿속에 저장하고 있지만 경험이 전무한 순수논리의 인간 ‘B박사’이다.
두 번의 대결에서 첫 번째는 순수논리의 ‘B박사’가 승리한다. 그러나 ‘B박사’의 약점을 간파한 챔피언의 교활한 심리전에 의해 두 번째는 패하고 만다. 그 약점이란 단 한 번도 살아 있는 사람과 겨뤄본 적이 없다는 것. 그의 체스는 진공 속의 추상적인 논리와 속도로만 훌륭하게 작동한다는 것. 기다림과 점점 늘어지는 시간, 소음과 눈빛들, 교감과 적대라는 살아 꿈틀거리는 ‘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B박사는 결국 패한 것이다.
<체스 이야기>는 감정적 동요로 무너지는 한 인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어쩌면 감정의 한계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실례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나는 거기에서 진짜 살아 있는 인간을 본다. 알파고와의 대결 뒤에 많은 사람들은 인공지능로봇이 세계를 지배할 세상에 대해, 수많은 일자리가 사라질 수도 있는 미래에 대해 우려한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인공지능로봇이 아니라 차가운 기계처럼 변모해가는 사람들과 냉혹한 사회 메커니즘이 아닐까.
<삶은 언제 예술이 되는가>(김형수)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한 인간을 만들기 위해서 수억, 수백억을 들여 수소, 질소, 단백질, 미토콘드리아 첨단 과학을 이용해도 우리는 인간을 만들 수 없다. 인간을 만드는 가장 쉬우면서도 어려운 방법이 있다. 그것은 두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하나의 물방울이 생명이 되는 신비, 그 속에서 모든 인간은 기적’이다.
그러나 가속화되고 있는 효율과 자본의 기계적 흐름은 그 ‘기적의 인간’을 망각해 가고 있다. 멀리서 인간 세계를 내려다 보면, 인간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고속도로와 공장이, 은행이 마치 생명체처럼 움직이고 무생물의 인간을 삼키고 뱉는 듯하다. 무인경비시스템, 하이패스를 비롯한 숱한 자동화 시스템과 무인텔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세상은 이미 인공지능에 점령된 무인사회의 한복판에 와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세상에서 인간이 기계와 별다를 게 없다고 할 수 있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최근 매체에 보도되는 숱한 아동학대와 학살들. 자본의 논리와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어가 저지른 참극, 국경에서 살해당한 ‘쿠르디’ 등. 세월호 사건 즈음에 보도된 뉴스 중에 아직도 나를 괴롭히고 있는 기사가 있다. PC방에서 게임을 하느라 두 살배기 아들을 방에 방치했다가 죽게 만든 20대 어린 아빠의 잔혹한 범죄. 아직도 가끔 나는 방 안에서 홀로 울고 있는 그 아이의 긴 울음소리를 듣곤 한다. 그 울음 위로 공명하는 세월호 아이들의 비명은 더욱 끔찍하다.
한나 아렌트는 나치 전범 아이히만을 두고 ‘악의 평범성’이라고 명명했다. 살인의 의도가 그를 범죄자로 만든 것이 아니라 자기 임무에 충실하고자 하는 기계적 복종이 괴물을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잠도 자고 휴식도 취해야 하고 수많은 불평을 쏟아놓는 노동자 대신에 일만 하는 기계에 열광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700만개 자리를 없애고, 대체할 수 있도록 인공지능을 개발하는 맹목적 기술 개발은 결코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공지능로봇으로 이익을 보는 ‘기계인간’을 위한 것일 뿐이다. 더 빨리 인공지능을 좇아 괴물이 되는 길에 집착하기보다는 우리의 현재를 인간화하는 것에 대해 고민하지 않으면 안된다.
감정은 패배의 요인일 수도, 인간의 한계와 무력의 증좌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감정은 진공이 아니라 살아 있는 환경과 사람들과 소통하고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서 ‘배려이자 돌봄’의 근원이다. 타인을 신경쓰고 거기에 굴복하는 감정이 아무리 인간을 무력하게 할지라도 그것이 살아 있는 생명이 놓여 있는, 세상의 원자수보다 더 무한한 상황에 대해 돌보는 능력인 이상, 그것은 치열한 무력이다.
계모에 의해 무인도에 버려진 어린아이가 관세음의 서원(다시 태어나 모든 고통에 귀기울이겠다는)을 세웠듯, 이 무인의 현실에서 냉혹한 기계가 아니라 관세음(觀世音)의 인간의 자리를 남겨두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곧 효율적인 논리와 공식의 알고리즘의 완벽한 구현이 아니라, 동요와 비효율일지라도 버그투성이의 감성을 우리 인간에게, 우리 사회에 허용하는 것이다.
정은경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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