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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은 <철종실록>으로 끝난다. 부록으로 끝에 <고종실록> <순종실록>이 붙어 있지만, 이것은 정식 실록으로 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두 실록은 일제강점기인 1927년부터 1935년까지 이왕직(李王職)에서 편찬한 것이기 때문이다. 편찬 책임자는 경성제국대학 교수 오다 쇼고(小田省吾)였다.

이왕직은 일제강점기에 이왕가(李王家)와 관련된 사무를 처리하기 위해 만든 관청이고, 그 장관이 일본인이었으니, 이 두 실록이 일제의 입장에서 쓰인 것은 물론이다.

실록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신문과 잡지다. 그 중에서도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 독립신문은 필독서로 꼽힌다. 하지만 이 신문의 영인본은 한 번 발간된 이래 다시 발간되지 않았다. 나는 지도교수님인 경인 선생님 댁에서 대한매일신보를 가져와 한동안 끼고 살았다. 매우 흥미로운 자료였다. 황성신문은 도서관에서 빌려 보았다. 중요한 자료는 복사했는데 복사한 것도 한 짐이었다. 대한매일신보는 오랫동안 보았기에 책이 좀 망가졌다. 돌려드릴 때 선생님 뵙기 사뭇 무안했다.대한매일신보를 돌려드린 뒤 나는 늘 이 신문을 한 질 구했으면 했다. 하지만 절판이어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얼마 뒤 이 책이 다시 영인되었다는 말을 듣고 당시 형편으로는 거금을 들여 어렵게 한 질을 샀다. 그날 밤 얼마나 기뻤던지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황성신문도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다가 뒤에 영인본이 나왔다는 소문을 듣고 역시 무리해서 한 질을 구했다. 독립신문도 간행한 지 오래되어 구할 수 없었는데 뒤에 모 교수님의 연구실에 갔다가 새로 찍은 책이 있는 것을 보고 출판사에 연락해서 구했다. 위의 세 신문은 모두 한일병합 이전에 발간된 것이다. 그 이후 신문은 어떠했던가? 1910년 일제는 한반도를 집어삼키자 항일적 논조의 신문을 모조리 폐간했다. 그리고 가장 항일적 논조를 유지했던 대한매일신보는 자신들이 인수해, ‘대한’ 두 글자를 떼어버리고, 매일신보로 만들어 총독부의 기관지로 삼았다. 매일신보는 조선일보, 동아일보가 생기기 전 유일한 신문이 되었다. 그 논조가 일제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것이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동시에 다분히 계몽성을 띠고 있었다. 이수일과 심순애의 신파로 유명한 조중환의 <장한몽>, 이광수의 소설 <무정>도 이 신문에 실린 것이다. 총독부 기관지이지만 이 신문만큼 조선의 사정을 소상히 다룬 신문도 없고, 또 당시 어지간한 문인들이 모두 이 신문에 글을 썼기에 일제강점기 초기를 연구하려면 이 신문을 읽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나 역시 20세기 초 서울에 관한 자료를 모아 <사라진 서울>이란 책으로 엮었는데, 그 중 서울 성곽, 시전에 관한 자료를 이 신문에서 뽑아 넣었다.




이 신문은 무척이나 보기 까다로웠다. 이 신문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었다. 신문 원본은 볼 수 없고 마이크로필름만 볼 수 있었다. 마이크로필름을 보는 일은 무척 피곤하다. 특히 신문처럼 판면이 크고 내용이 많은 자료는 한 면 한 면 화면에 띄워놓고 기사를 읽어야 하는데, 이게 정말 고역이다. 워낙 글자가 작아 보이지도 않는다. 해당 자료를 찾으면 프린트를 하면 되는데, 프린트는 값비싼 사진 인화지에 하게 되어 있어 가난한 대학원생의 입장에서는 경제적으로 적지 않은 부담이었다. 어쨌거나 한동안 남산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매일신보를 보면서 자료를 찾던 일이 어제 같다.

연구자들의 고통을 누군가가 헤아렸던지 1985년 이 신문이 영인되었다. 보고 싶었지만 개인이 살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금액이었다. 하는 수 없이 아는 선배를 통해 서울 모 사립대학에 소장된 영인본을 빌려 보기 시작했다. 1910년부터 1919년 3·1운동 직전까지 훑었는데 20세기 초반 한국 사회의 급격한 변동을 이 신문을 통해 짐작할 수 있었다. 충격적인 것도 있었다. 그동안 항일 언론인으로 알고 있었던 장지연(張志淵)이 이 신문에 700편이 넘는 글을 싣고 있었던 것이다. 황성신문사 사장으로 을사조약에 거세게 항의해 ‘시일야방성대곡’이란 논설을 쓰고 급기야 그 일로 투옥까지 된 장지연이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에 글을 싣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학원에서 계몽기 신문을 자료로 삼는 강의를 개설했더니 학생들이 대한매일신보 등을 복사해 온다. 영인본에서 복사한 것이 아니다. 물었더니 인터넷에서 원문을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세월 많이 좋아졌구나! 하지만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 넣어야 짜다고 그것을 읽어 의미를 찾는 일은 역시 연구자의 일이다. 들으니 요즘 대학원생들은 옛날 신문을 읽지 않는다고 한다.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의 한문에 가까운 국한문혼용체는 물론 한자가 많이 섞인 신문을 읽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마이크로필름은 자료를 볼 수 있는 방법으로 상당히 괜찮은, 하지만 한편으로는 상당히 불편한 방법이었다. 뒤에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도 상당히 많은 마이크로필름을 제작해 거기서 필요한 자료를 열람할 수 있었다. 연구원의 마이크로필름은 사진 인화지가 아니라 보통의 종이에 프린트할 수 있는 것이었기에 값이 아주 쌌다. 부산대에 부임한 뒤 경제학과에 계시는 선생님(아주 친한 친구의 숙부이기도 하다)이 도서관장으로 계시면서 주선해 규장각의 마이크로필름을 복제해 도서관에 들였다. 그때 어떤 사람들은 그게 무슨 소용이 있냐고 했지만 어쨌든 가져오고 나니 많은 사람들이 이용한다. 일단 연구에 필요한 자료는 많이 확보하는 것이 우선이다.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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