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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이후 조선 지식인들의 저술을 보면 갑자기 그 양이 많아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다산의 엄청난 양의 저술이 대표적이며, 다른 학자들도 다산만큼은 아니지만 결코 그 지적 노동의 양이 적지 않다.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같은 책도 오랜 시간이 소요된 엄청난 분량의 저작이다. 정조의 문집 <홍재전서> 역시 어마어마한 분량이다.

저술의 양이 불어난 이유를 궁리하다가 안경이 도입된 것도 중요한 이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조선 지식인들이 즐겨 보던 중국책들은 글씨가 작은 것이 많았는데, 이것은 노안으로는 볼 수 없는 것들이다. 안경은 임진왜란 이후 북경에서 수입되기 시작해 18세기 지식인들 사이에 널리 사용되었으니, 아마도 안경의 보급이 보다 많은 책을 볼 수 있게 하고, 많은 저술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이처럼 테크놀로지의 발달은 학문에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인쇄술이 지식의 확산에 기여했듯, 우리가 범상히 여기는 안경, 복사기 역시 학문 발달에 기여했을 것이다. 물론 컴퓨터는 말할 것도 없다. 내가 전공하는 한국학 쪽에서는 영인본의 제작이 학문 발달에 크게 기여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영인본은 극소수의 사람이 독점하고 있던 희귀한 자료를 관심 있는 학자들에게 개방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20대 중반부터 어느 분을 통해 책을 사들였다. 그분은 주로 한국학 관계 영인본을 팔러 다녔다. 그분은 평생을 책 팔러 다녔기에 알 만한 학자들은 다 알았다. 하도 오래 거래하다 보니 조금은 무람없는 사이가 되었다. 어느 날 내 연구실로 와서 다리품을 쉬며 이제 이 노릇도 그만둘 작정이란다. 30년을 훌쩍 넘었을 것이다. 이 양반이 우연하게 처음 <훈민정음> <월인천강지곡> 등 국학 관계의 중요 문헌을 팔았던 그날을 이야기한다. 요약하면 이 책을 본 사람들의 반응이 희한했다고 한다. 원본과 꼭 같은 영인본, 그것도 고서처럼 선장한 책이 눈앞에 있어 눈이 휘둥그레지던 국어 교사와 역사 교사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했다. 하기야 누가 <훈민정음>을 보았으며,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을 보았더란 말인가?




1970년대 국학 붐이 불면서 영인본 시장은 활황을 맞았다. 문집이며 사료들이 영인본으로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영인본은 사실 제작하기 수월한 편이다. 마스터 인쇄로 찍으면 값싼 영인본이 만들어졌다. 좀 더 신경을 쓰는 곳에서는 기획을 해서 일정한 주제 아래 책을 모아서 내고 사진원판을 제작해 영인본의 수준을 높였다. 하지만 그것은 일부였고, 돈만 되면 어느 책이나 손쉽게 영인본을 찍었다. 그래도 큰 상관은 없었다. 도서관의 서고에 갇혀 있던 책들이 깔끔한 양장본의 형태로 눈앞에 나타났으니 말이다. 연구자들은 영인본을 사들였고 그것에 의지해 논문을 썼고 책을 썼다. 확실히 영인본 제작이 학문 발달에 적지 않게 기여한 것이다. 하지만 영인본을 찍는 출판사는 거개 영세했고 한 번 영인본으로 찍은 책은 다시 찍는 법이 없었다. 그 영세한 영인본 제작의 시대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민족문화추진회에서 영인본의 대종을 이루는 문집에 표점을 하고 정교한 영인본을 만들어 보급하면서 영인본 시장이 타격을 입은 것이다.


하지만 가장 큰 변화는 컴퓨터와 인터넷의 출현에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규장각, 국사편찬위원회, 한국학중앙연구원, 국립중앙도서관 등에서는 인터넷으로 검색할 수 있도록 원전 자료를 디지털화해 놓았다. 이런 판이니 굳이 돈 들여 영인본을 구입할 필요가 없다. 이제 영인본 자료는 거의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예전에 남이 사니까 나도 산다는 식으로 경쟁하듯 책을 사들이던 대학원생들도 책을 사지 않는다. 연구동에 다니던 책장수들이 사라진 지 오래다. ‘공부해봐야 무슨 소용인가’라는 자조적인 분위기도 한몫할 것이다.

테크놀로지의 발달은 학문하는 행태도 바꾼다. ‘대한매일신보’나 ‘황성신문’ 등 구한말 신문도 모두 인터넷으로 검색할 수 있다. 편리한 세상이기는 하지만, 조금 걱정은 된다. 옛날 ‘대한매일신보’를 볼 때는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겨가면서 읽고 자료를 찾았다. 그러는 중에 내가 찾는 자료뿐만이 아니라 다른 자료도 읽을 수 있었고 그 시대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연구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기도 했다. 하지만 검색어를 찾아서 원하는 것만을 얻는 방법은 그런 과정을 없애버린다. 편리하지만 연구자로서의 자세는 아니다. 또 검색된 자료는 많지만, 그 자료가 어떤 맥락에 놓여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즉 빙산의 윗부분만 보고 그 아래의 거대한 부분을 놓치게 되는 것이다. 편리한 것이지만, 그 편리가 도리어 학문을 망치는 경우도 허다한 것이다.

<열녀의 탄생>을 쓸 때 경험을 들어본다. 하고 많은 문집 속에 열녀에 관한 자료가 어떻게 있는 줄 아는가? 지금은 고전번역원(옛날의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그동안 영인한 <한국문집총간> 300책을 디지털화 해서 인터넷에 올려놓았다. 검색 기능도 괜찮아 찾고 싶은 자료를 적당한 검색어로 찾아볼 수 있다.

만약 ‘열녀’라는 말이 나오는 문헌을 찾고 싶다면, ‘열녀’라는 검색어로 검색하면 된다. 그 검색 결과는 많지만 읽고 필요한 것을 취하면 된다. 그런데 <열녀의 탄생>을 처음 쓸 시기에는 디지털화는 꿈도 꾸지 못할 때였다. 하는 수 없이 책을 모두 가져다 놓고 목차부터 읽어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결과는 어떠했냐고? 귀찮고 힘들기는 했지만 아주 좋았다. 내가 필요한 자료를 챙길 수 있었던 것은 물론이고, 그 기회를 통해 다른 자료들도 폭넓게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인터넷의 검색 기능만으로 이런 것은 불가능하다.

정리하자. 컴퓨터와 인터넷의 발달은 앞으로 학문 연구에 어떤 변화를 일으킬 것인가? 긍정적인가, 부정적인가. 실로 궁금한 문제다.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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