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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2017년 5월12일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3일 만에 첫 대외 활동으로 그동안 비정규직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돼 왔던 인천공항공사를 방문해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시대’를 선언했다. 행사 현장에 있던 일부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고, 이 뉴스를 접한 일부 문 대통령 지지자들도 눈물을 흘렸다. 오마이뉴스의 관련 기사에 달린 ‘베스트 댓글’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악조건에서, 불안하게, 근무하던, 1만명의 직원들이 정규직이 된다? 내가 다 눈물이 나네요. 대통령의 민생문제 해결의 진정성에, 감동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네요. 더군다나, 정규직화로 인하여, 경비도 3% 정도 절감된다는데, 어찌하여 이제까지 못했었는지… 사랑의 마음으로 들여다보면, 인천공항처럼, 큰 비용 안 들이고도, 노동자들의 애로사항을 해결할 수 있는 길도 많이 있다고 봅니다. 좋은 소식 계속되기를 빕니다.”

세상에 이렇게 훌륭한 대통령이 있다니! 이렇게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나 보다. 문 대통령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기 시작했다. 대통령 지지율은 리얼미터의 5월 둘째 주 여론조사에서 74.8%를 기록했다. ‘비정규직 제로시대’는 공공부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정부가 공공부문을 먼저 할 테니 기업들도 그렇게 하라는 것이었다.

우선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시대’의 결과는 어떠했는가? 4년 후인 올 6월4일 인천공항 카트 운영·송환대기실 노동자들은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처우 개선과 비정규직의 완전한 정규직화를 촉구했다.

‘비정규직 제로시대’ 선언 후 4년
비정규직은 역대 최고로 증가
임금격차를 ‘능력주의’로 포장해
차별을 당연시한 결과였다

진보는 ‘희망 고문’ 중단하고
처우 개선 등 현실적 해법 모색해야

노조는 인천공항 비정규직 노동자 중 99%는 자회사에 고용됐지만, 인천공항 정규직은 1년에 182일 근무하는 반면 자회사 직원은 243일로 1년에 61일 더 일하고도 평균 임금은 정규직의 3분의 1밖에 안 된다며 차별 해소와 처우 개선 등을 요구하고 나섰다.

문 정부는 전반적인 공공부문 성과를 강조했지만 정작 나라 전체의 정규직화 현황은 역대 최저 수준으로 악화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지난 2월 통계청장을 지낸 유경준 국민의힘 의원은 경제활동인구조사 패널데이터를 분석해 문재인 정부 출범 4년 동안 비정규직이 무려 94만5000명 늘어 역대 정부 가운데 증가 규모로는 최고치라고 주장했다. 이에 고용노동부가 반박자료를 내는 등 논쟁이 벌어졌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모든 노동시장에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허황된 꿈에 가까웠다는 점이다.

문제의 본질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격차였다. 이 문제를 외면하지 말고 정면으로 대응해 부문 간 임금격차를 줄이는 사회적 대타협을 이끌어내면서 비정규직도 충분히 먹고살 수 있게끔 하는 게 현실적인 방법이었다. 이건 경제학을 몰라도 상식적인 수준에서 얼마든지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가.

그럼에도 우리는 과도한 임금격차를 ‘능력주의’로 포장해 당연시하면서 방치했다. ‘모든 노동자의 대기업 노동자화’와 ‘모든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라는 목표를 진보적인 것이라고 내세우면서 언제 실현될지도 모를 기약 없는 ‘희망 고문’에만 매달렸다.

그래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박종성 경향신문 논설위원이 잘 지적했듯이, 한국 사회에서 정규직 진입은 ‘사활의 문제’가 되고, “정규직의 성안으로 들어가면 문을 닫아버리고 자신만 살겠다”고 혈안이 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대기업 정규직과 같은 좋은 일자리는 늘 모자라고 게임이 반복될 때마다 누군가는 탈락하고 추방되어야 하기 때문에 모두가 탈락의 공포에 시달리는 ‘의자 뺏기 게임’에 몰두한다. 이게 바로 그간 한국에서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추진되어 온 정책들의 기본 골격이었다.

문 대통령은 인천공항을 방문했을 당시 국가 경영을 맡은 지도자라기보다는 정규직은 좋고 비정규직은 나쁘다는 선악 이분법을 설파하는 도덕적 설교자였다. 이런 ‘도덕 정치’의 분위기가 전국을 휩쓸었다. 길거리 여기저기엔 “비정규직 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는 현수막이 내걸렸고, 진보 진영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총집결한 것처럼 보였다.

그 누구도 ‘일자리 창출’도 하면서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게 가능한가 하는 점에 대해선 묻지 않았다. 대기업 정규직의 임금 양보 문제는 아예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무지한 동시에 비겁했다. 그러나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는 걸 어이하랴. 문 대통령의 지지도는 한국갤럽의 6월 첫째 주 여론조사에서 84%를 기록하면서, 지지자들은 “우리 이니 맘대로 해봐”라고 외쳐대고 있었다. 문 정권의 비극이 이미 이때부터 시작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문 대통령만 탓할 일은 아니었다. 진보는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보수가 하면 듣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반대로 나아가려고만 했다. 물론 보수 역시 그랬다. 진보 진영에 속하는 그 많은 경제학자들 중 문 정권이 빠져 있는 ‘경제의 도덕화’를 비판할 사람이 그리도 없었던 말인가. 없었다! 있었을지라도 문 대통령의 노동정책에 감격하는 사람들이 많은 상황에서 굳이 나서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불행 중 다행히도 최근 들어 진보 진영에서도 좀 다른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참여연대 사무처장 출신인 김기식 더미래연구소 정책위원장은 한겨레(2020년 11월11일)에 기고한 ‘우리 시대 진보란 무엇인가’라는 칼럼에서 “3차 산업 중심의 고용구조하에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만이 대책일 수 없다. 노동권이 강한 독일조차 2017년 기준 비정규직 비율은 35.1%로 32%인 우리보다 높다. 그런데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만 주장되고, 임금구조 개편은 논의의 대상조차 되지 못하고 있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연차에 따라 임금이 정해지는 연공급 구조는 직무급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상시업무의 정규직화는 당연하지만, 산업구조상 발생하는 비정규직에 대해서는 임금 등 차별을 금지하고, 나아가 시간당 임금을 정규직보다 더 주도록 하는 것이 실질적 대책이 될 수 있다. 개별 기업 차원이 아니라 산별 교섭을 통해 독일처럼 대기업의 인상폭은 낮추고, 중소기업의 인상폭은 높이는 연대임금전략이 실행되어야 한다. 모두 진보의 기반인 노조, 특히 대기업, 공공부문 노조의 저항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그것에 도전해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려 하지 않으면서 청년세대에게 진보에 투표하라 할 수 있는가.”

진보 정치인 중에선 박용진 민주당 의원이 진실을 정면 대응한 거의 유일한 의원이기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올 2월에 출간한 <리셋 대한민국>에서 “비정규직을 전부 철폐할 수 있다는 거짓말을 그 누구도 더 이상 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한다. “비정규직 자체를 없애는 건 토머스 모어가 설파한 유토피아의 도래일 수도 있고, 혹은 플라톤이 묘사한 이데아의 실현일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이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점이에요. 따라서 정치인들이 국민들에게 단지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만으로 겪고 있는 부당하고 불합리한 차별을 없애주겠다, 그리고 차별하면 꼭 처벌하겠다고 약속해야만 옳습니다.”

원승연 명지대 교수는 한겨레(2021년 6월2일) 인터뷰에서 “대통령이 현장을 찾아가 정규직화를 선언하는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며 이렇게 말한다. “산업구조의 변화로 정규직화가 쉽지 않다. 기업에 무조건 강제할 수도 없다. 비정규직 처우 개선 방법을 더 고민했어야 한다. 동일한 종류의 노동에 동일한 임금을 주는 ‘동일노동 동일임금’ 도입도 중요하고, 고용 안정 노력과 사회안전망 강화도 필요했다. 정치적으로는 독재정권에서 탈피했는데, 경제적으로는 과거 방식을 그대로 답습한다.”

뒤늦게나마 6월17일 민주당 대선 주자인 정세균 전 총리가 출마선언식에서 ‘비정규직 우대 임금제도 도입’ 등 비정규직 문제를 정면 대응하는 공약을 발표한 게 반갑다.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려야 했는가. ‘경제의 도덕화’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진보의 한심한 수준에 대한 쓴소리는 더 쏟아져 나와야 한다. 그래야 진보는 학예회를 하는 게 아니라 국정운영이라는 무서운 책임을 지고 있다는 걸 자각하게 될 것이다. 진보는 ‘책임윤리’를 두렵게 생각해야 한다. 우선 당장 ‘비정규직 없는 세상’은 거짓말이라는 걸 인정하는 기반 위에서 ‘희망 고문’을 중단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어려움과 고통을 덜어주는 현실적인 해법을 모색하고 실천에 옮겨야 할 것이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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