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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에서 내려 거문도에 발을 딛는 순간, 몇 가지 생각도 훌쩍 따라 내렸다. 시골에서의 어린 시절, 제사 지내고 나면 음식은 고방으로 가고 병풍과 제기는 다락이나 시렁으로 올라갔다. 반지로 남은 여러 시절을 통과하고 한 큰 매듭에 이르니 이제 옛날의 그것들처럼 나도 그 어떤 선반 위로 올라간 느낌이 든다. 그만큼 하늘에 가까워졌다는 뜻이리라.

10년 단위로 묶으면 고작 여섯 번 만에 도달한 고개이다. 이제 마지막 고비까지 두세 번 남았는가. 앞으로의 첫 구간을 지탱할 한 글자의 주제어로 ‘문’을 택했다. 논어의 한 대목, 행유여력즉이학문(行有餘力則以學文, 행하고도 힘이 남은 뒤에야 글을 배운다)이라고 할 때의 그 문(文)이다. 그런 총중에 거문은 ‘巨文’이라 하니 더욱 특별한 느낌을 아니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낚시꾼과 관광객을 유혹하는 간판과 영국군 묘지의 이정표가 어우러진 시내를 가로질러 거문도 등대로 걸어갔다. 몇 개의 섬이 병풍처럼 둘러선 거문도는 호수처럼 평온하고 고요했지만 출렁대는 파도를 따라 이 섬의 근심과 걱정도 따라 흔들리는 듯하다. 빈 가게가 여럿이다.

거문도 등대까지 가는 길은 동백나무 숲이 터널을 이루는 꽃길이었다. 통으로 떨어진 동백꽃은 길바닥을 밝힌다. 바위에 걸터앉은 꽃도 있다. 짙은 응달의 돌 안에서 누군가 바깥을 내다보는 느낌. 드디어 등대에 도착했다. 아담한 입구에서 서성거리는 건 까마귀쪽나무들이다. 바닷바람을 상대하느라 거칠 수밖에 없겠지만 길쭉한 잎은 둥글게 모여 나고, 수형도 깔끔하고 매끈하다. 동백꽃잎을 올려놓은 듯 빨간 모자를 쓰고 있는 등대 너머로 서로 구별이 되지 않는 쪽빛들. 바다에는 배가 있고 하늘에는 비행기가 지나간다. 혹 영국으로 가는 비행기인가? 까마귀쪽나무, 녹나무과의 상록관목.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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