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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지나고 벌써 한 달. 아라비아 숫자가 큼지막한 달력 아래에서 살지만 그 속에 숨은 24절기를 올해부터 몸에 밀착시키기로 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보아도 고작 오늘밖에 살지 못하는 내가 한 해의 중심을 그 어디로 삼는 건 부질없는 일이겠지만 한해살이의 시작을 입춘(立春)에 맞추는 게 좋을 듯하다. 봄이 저기에 저렇게 서는 것처럼 나도 여기에 이렇게 독립적으로 서는 것에서부터 출발하기로 하자.
설 연휴의 여세를 몰아 오래전부터 별렀던 교동도에 갔다. 아직도 명절이면 찾아오는 어릴 적 냄새가 조금 남아 있을 것도 같았다. 저물 무렵을 겨냥했지만 도착하고 보니 늦은 오후였다. 교동제비집에 들러 몸을 녹인 뒤 대룡시장에 갔다. 좁은 골목마다 그 시절을 통과해낸 사람들이 추억에 젖은 얼굴로 서성거린다. 관광객들로 불이 난 호떡집을 비롯해 이런저런 점빵들 사이로 효도관광, 신혼여행 안내문도 있다. 장례식장 빼놓고 있을 건 다 있는 시장. 그 끄트머리에서 산 가래떡을 입에 물고 골목을 벗어나니 교동초등학교가 있다. 제106회 졸업식을 축하하는 현수막 옆으로 우람한 측백나무들이 도열해 있다. 교문 기둥을 만지는데 어쩔 수 없이 내 고향 초등학교의 졸업식 생각이 났다. 풍금 소리에 맞춰 졸업식 노래를 부르고 나온 언니들은 교문을 부여잡고 한참을 울고 난 뒤에 흩어졌었지. 학교 담벼락에 초상화가 있다. 이 학교를 떠나고, 이 세상도 마저 졸업하신 다섯 분의 제1회 졸업생들.
방학도 없이 학교를 묵묵히 지키고 있는 건 측백나무들이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 아름….” 목구멍이 조금 간질간질해지는 그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운동장을 걸어 새삼스레 나무를 세어보았다. 좌측으로 54그루, 우측으로 29그루. 이 학교와 이 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빠짐없이 기억하고 저장하는 건 측백나무들이다.
멀리 해가 뚜렷하게 지는 것을 보면서 시장으로 돌아와서 양초를 샀다. 이제 집에 가서 불을 켜면 겨울에도 푸르른 측백나무 사이로 많은 생각이 푸르륵 일어나겠다. 교동도의 측백나무, 측백나무과의 상록 교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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