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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허공의 한 자리를 차지하신 외할머니의 표현을 빌린다면 오늘은 공일(空日)이다. 거문고에 능한 친구와 휴일의 오후에 인왕산으로 향했다. 지하에서 올라와 선바위를 향하는데 굿당 벽에 무학대사의 오도송이 적혀 있다. 靑山綠水眞我面 明月淸風誰主人(푸른 산 푸른 물은 나의 참모습이니 밝은 달 맑은 바람은 누가 주인인가).

칠언절구 중에서도 열한 번째의 바람 풍이 눈에 확 들어오는 건 최근의 한 생각 때문이다. 바람 풍(風)에 벌레 충()이 들어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알게 되었다. 벌레하고 숨바꼭질을 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이제야 그 빤한 사실을 접수하게 되었을까. 바람에 벌레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자 바람소리가 좀 다르게 들리기 시작했다. 바람소리는 바람의 소리가 아니다. 그것은 바람이 사물들과 부딪쳐 내는 소리다. 세상 만물에는 무언가 꿈틀거리고자 하는 벌레들이 숨어 있고 그래서 그들을 일깨우면 그것들이 일어나 이 세상을 발효시킬 것이라는 생각.

둥둥둥. 바람결에 실려오는 건 국사당에서 굿하는 소리였다. 자연스럽게 궁리에서 펴낸 <만신 김금화>의 저자이신, 며칠 전 허공으로 거처를 옮기신 김금화 선생님(1931~2019)의 명복을 다시 한번 빌면서 인왕산으로 내처 올라갔다.

먼저 도착한 친구가 귤과 삶은 계란을 건넸다. 배경으로 단가 ‘죽장망혜’를 틀어놓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바람이 실어 나르는 미세먼지가 물결처럼 띠를 이루며 출렁출렁 시내를 훑으며 지나갔다. 인왕산은 바위산이다. 희미한 실핏줄 같은 등산로 옆 날망에 표지판이 있다. ‘위험해요.’ 암벽에 미끄러지지 말라고 주의사항을 설치해놓은 것이다. 위험이란 게 어디 지금 이 자리, 인왕산 정상에서만의 일일까. 정작 위험한 곳은 오히려 저곳이라고, 위험한 서울을 지그시 가리키는 팻말 옆에 나무가 있다. 바위를 거처로 삼아 자라는 날씬한 소나무 옆의 싸리였다. 가뭄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나무. 작년의 잎과 작별하지도 못한 채 전신이 배배 꼬여 비를 기다리고 있는 싸리. 나무 안에 웅크린 벌레여, 잠시만 기다리게. 이제 곧 경칩(驚蟄)이네! 싸리, 콩과의 낙엽관목.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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