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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산맥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광야’, 이육사)는 한 개결한 시인의 뛰어난 상상력의 소산이었다. 그로 인한 영향인가. 저 만주 벌판에서 땅이 아래로 달음박질해서 내려와 남해로 풍덩 뛰어든 게 한반도의 지형이라 생각하기가 쉽다. 하지만 제주의 한라산(1950m)이 가장 높고 지리산(1915m)이 그다음이고 설악산(1708m)이 막내인 것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생명이 바다에서 온 것처럼 산도 물에서 온 게 아닐까.

‘봄의 꽃 소식은 북상하지만 가을의 단풍 소식은 남하한다’(과학의 한귀퉁이, 김홍표)는 엄연한 과학적 사실이다. 그래서 강원도의 저 야단스러운 단풍도 남해 근처에 이르러서는 다소 수굿해질 것으로 짐작해 왔다. 이 또한 나태한 내 상식의 등짝을 후려치기에 족한 것이었다.

뜻밖의 나무를 기대하며 찾은 거제도 북병산. 몇 개의 연륙교로 너나들이하는 형편이지만 그래도 섬은 섬이다. 모든 것을 단단하고 옹골차게 밀집시키는 재주를 섬은 가졌나 보다. 거제의 단풍은 내 짐작을 보기좋게 배반하는 게 아닌가. 공중은 공중대로, 낙엽은 낙엽대로, 오밀조밀하기가 이를 데 없었고 알록달록하기가 그지없는 섬의 단풍들.

지금 산에 이렇다 할 꽃이 없다고 하나 쪼그리고 앉아 눈을 맞추면 눈에 들어오는 꽃들이 아직도 수북하다. 골무꽃이 싱싱하고, 한라돌쩌귀도 늠름하게 피었다. 아마 이 골짜기가 보유한 마지막 용량일까. 남녘의 꽃들이 이처럼 안간힘을 다하는 것처럼 지금 강원도 어느 인적 없는 심산유곡에서는 매미가 마지막 숨을 몰아쉴지도 모를 일…이라고 상상하면서 숲과 덤불을 빠져나오는데 무엇인가 바지를 콕콕 찌르는 느낌이 있다.

식물들은 자신의 전부를 몽땅 집어넣은 열매를 가급적 멀리 보내려고 기발한 전략을 동원한다. 바람, 새, 다람쥐를 부르기도 하지만 오늘 나도 모르게 나를 이용하는 건 도깨비바늘이었다. 내가 섬, 단풍을 비롯한 눈앞의 풍경에 감탄하는 사이 내 바지에 슬쩍 들러붙은 도깨비바늘. 다 뗐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미끼였고 집에 와서 보니 정작 튼실한 녀석은 엉덩이에 붙어 서울까지 진출했다. 네가 이겼다! 도깨비바늘, 국화과의 한해살이풀.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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