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심산유곡은 아니지만 ‘심’ 자로 시작하는 심학산 아래 웅크리고 지내면 뜻밖의 일을 겪기도 한다. 새벽 3시에라야 새벽 3시의 생각은 찾아오는 것. 북으로 가던 철새가 고도를 낮추어 퉁소를 연주하는 심야 음악회도 있다. 그렇게 몇 밤을 건넌 뒤 서울로 나오면 어디 먼 고대(古代)로부터 외출했다는 느낌이 들 만큼 도시는 부황하고 아찔하다. 그제는 몇 가지 볼일을 몰아서 서울의 가장 번화한 곳으로 가야 했다. 따뜻한 곳만 따뜻하고 추운 곳은 아주 추운 서울. 무려 20층짜리 엘리베이터를 타고 행사에 참석한 뒤 사기접시 속의 점심을 먹고 옛날 궁리출판의 자리에서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구름으로 가는 징검다리처럼 의젓한 인왕산.

서촌의 통인시장 근처 길담서원에 들렀다. 오래전 마음이 허할 때, 이 벽의 책들을 다 읽으면 뭔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했다가 아주 인상적인 말씀을 들은 바가 있었다. 다시 같은 질문을 한다면 이번에는 무슨 진전된 답을 주실까. 손바닥만 한 정원을 지나고 현관을 들어서자 벽마다 책들이 빼곡하고 한쪽의 한뼘미술관에서는 풍경화가 전시 중이다. 고래(古來)의 공기가 흐르는 듯한 길담서원. 사방의 은은한 문자향을 즐기다 결국 마음속 질문은 꺼내지 못했다. 곧 서울을 떠나신다고요. 공주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내년 봄 백제의 고도(古都)에서 답을 듣는 것으로 미루고 때이른 작별인사만 드렸다.

황현산과 김용옥. 두 권의 책을 사고 일어서는데, 학예실장님이 문밖까지 나오셨다. 화단에서의 대화. 이 녹색 때문에 그나마 견딜 수 있었네요. 하늘메발톱, 산국, 인동초, 맥문동, 조팝, 찔레, 앵두나무. 한철을 함께한 동무들의 이름을 불렀다. 이제 겨울 문명을 일구려는 꽃밭. 이름을 듣고 보니 아주 쓸쓸하지도 낯설지도 아니했다. 푸석한 토질을 가리키며 능청 늘어진 줄기에 빽빽하게 보랏빛 열매가 달려 있다. 좀작살나무였다. 내 은연중의 질문을 눈치채고 무슨 답을 주시는 게다. 안의 저 책이 아니라 바깥의 이 열매! 공중을 빠져나가는 한 입구처럼 병목현상이 벌어지는 좀작살나무 열매를 보다가 깊숙이 절하고 나의 고대로 얼른 복귀했다. 좀작살나무, 마편초과의 낙엽관목.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지난 칼럼===== > 이굴기의 꽃산 꽃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주풀  (0) 2019.12.17
태백산 백단사 아래 물참대  (0) 2019.12.10
거제도의 도깨비바늘  (0) 2019.11.26
갈대와 억새  (0) 2019.11.19
천마산의 생강나무  (0) 2019.11.12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