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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사유와 성찰

걷기

opinionX 2014. 9. 26. 21:00

“나를 움직이는 연료는 침묵이요/ 나의 엔진은 바람이요/ 나의 경적은 휘파람이다/ 나는 아우토반의 욕망을 갖지 않았으므로/ 시간으로부터 자유롭다/ 하여 목적지로부터 자유롭다/ 나는 아무것도 목표하지 않는다/ 목표하지 않기에 보다 많은 길들을/ 에둘러 음미한다”(유하 ‘나는 추억보다 느리게 간다’ 중에서)

걷기는 아주 평범한 일상 행위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인간의 발달 과정에서 걸음마는 매우 중대한 도전이다. 네 발 짐승처럼 기어 다니다가 두 발을 딛고 우뚝 서서 걷기 시작할 때 커다란 성취감을 느끼게 된다. 아기들은 직립보행을 배우면서 새로운 신체 감각을 갖고, 주변 환경을 전혀 다르게 감지할 수 있다. 한결 높아진 시야로 세상을 드넓게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어린 새들이 처음 공중을 날아오를 때 그와 비슷한 경이로움을 느끼지 않을까 싶다.

자라나면서 걷기는 무심한 습관이 된다. 그러나 이따금 중대한 의미를 담는 경우가 있다. 그 전형적인 것 가운데 하나로 행진을 들 수 있다. 축제나 기념일에 종종 펼쳐지는 퍼레이드는 가슴 설레게 하는 구경거리다. 군대 행사에서 수백명의 장병들이 반듯한 대열을 유지하며 힘차게 나아가는 모습은 그 자체로 장관(壯觀)이다. 어떤 규칙에 맞춰 일제히 움직이는 몸짓은 일상의 고루함을 벗어나게 해주는 활력소가 된다. 우리는 그 집단 에너지를 공유하면서 비좁은 마음의 벽을 잠시 뛰어넘는다.

그런데 그러한 율동은 연출과 동원이라는 한계를 지닌다. 잘 짜여진 각본에 따라 기계적으로 지어내는 퍼포먼스 앞에서 관람객들은 가만히 서서 바라볼 뿐이다. 스스로 주인공이 되는 행진은 없을까. 정치적 시위가 그것이다. 정형화되지 않은 행렬이 뿜어내는 위풍당당함은 많은 사람들의 소망과 비전을 표출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대오를 이뤄 거리를 장악하고, 그 의연한 발걸음들이 세상을 바꾼 역사적 장면들을 우리는 여럿 기억한다. 거기에서 보행은 어떤 메시지를 발하는 소통이다.

걷기의 의미적 속성은 거창한 집합 행동이 아니더라도 다양하게 발현된다. 산책이라는 일상의 소일거리를 생각해보자. 거기에 무슨 목적이 있는가. 만일 오로지 건강을 위해서 걷는다면 그냥 운동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목적지가 있는가. 그것 역시 순수한 의미의 산책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산책을 할 때 육신은 어딘가에 도달하기 위해 이동하는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다. 우주와 마음이 이어지는 통로다. 몸으로 사유하고 느끼는 일종의 정신 행위가 바로 산책이라고 할 수 있다.

걷기를 통해 삶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도 한다. 프랑스의 청소년 교화 단체 ‘문턱(Seuil)’은 범죄의 길에 빠져든 10대들에게 장거리 도보 여행을 통해 자아를 새롭게 만날 수 있는 프로젝트를 운영하고 있다. 3개월 동안 무려 2000㎞를 외국에서 어느 낯선 어른과 함께 걷는 것이 교도소 수감을 대신하는 과제로 주어진다. 걷기가 뭐길래? 순간의 충동에 익숙한 아이들은 생애 처음으로 경험하는 그 긴 여정 속에서 지속의 기쁨을 맛볼 수 있다. 규칙을 지키고 약속을 이행하는 자신의 모습에서 느끼는 뿌듯함, 고된 발걸음에 기꺼이 함께해주는 동행자의 지지는 새로운 도전에 나설 수 있는 디딤돌이 된다. (자세한 내용은 베르나르 올리비에 외 지음 <쇠이유, 문턱이라는 이름의 기적>에 실려 있다.)

서적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출처 : 경향DB)


막다른 골목에 처한 청소년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리라. 온 마음을 담아 걸어갈 때 우리는 원대한 존재에 접속된다. 위에 인용한 시인의 말대로 침묵과 바람을 동력으로 삼아 한 걸음씩 나아가면서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아무것도 목표하지 않기에 많은 길을 에둘러 음미할 수 있는 드넓은 시야를 갖게 된다.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의 파노라마에 가슴을 활짝 열어두면서 그 안에 담겨 있는 사물들을 섬세하게 느낄 수 있다. 그 여백의 부피만큼 우리는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아우토반의 욕망’으로 내달려온 근대의 질주는 엄청난 성취를 이루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잔혹한 현실을 빚어냈다. 외형적 성과에 대한 맹신은 스피드 숭배로 이어져 삶을 도구화했다. 그 결과 사회와 일상 곳곳에서 ‘싱크홀’이 발견되고, 사람됨의 근본이 무너지고 있다. 과연 나는 제정신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자기도 모르게 괴물이 되어가고 있지는 않은가. 시간의 흐름이 잔잔해지는 가을의 산책로 위에서 문득 자문해본다. 깊고 푸른 하늘을 우러러 얼굴을 비추어본다.


김찬호 | 성공회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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