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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 2.9%, 국회 3.2%, 행정부 8.0%, 사법부 10.1%. 무슨 수치일까? 지난 2007년 10월에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가 동아일보와 함께 실시한 ‘한국 사회기관 및 단체에 대한 신뢰도’ 조사 결과이다. 이 사회를 좌지우지하는 ‘권력체’들이 두 자릿수를 넘기지 못하는 신뢰도를 갖고 있다는 것은 경악할 일이다.

7년이 지난 지금, 좀 나아졌을까? 긍정적인 답을 내리기 어렵다. 신뢰도를 올렸을 만한 일을 했다는 기억이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더 나빠졌을 것이라는 추측에 훨씬 더 공감이 간다. 그간 나라의 꼬락서니가 그러하다.

‘갑질’이라는 말이 유행어가 될 정도로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의 횡포가 만연해 있다. 하지만 정당, 국회, 행정부, 사법부가 갑과 을의 갈등에 뛰어들어 을의 권리를 ‘실제로’ 지켜주었다는 소식을 접한 바가 없다. 경제민주화 입법을 추진했다 하고, 을지로(‘을을 지키는 길’) 위원회 활동을 펼쳤다고 한다. 간간이 부당 해고 및 처우에 대한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서민의 삶은 여전히 팍팍하다. 아니 팍팍하다는 표현마저 한가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2013년 2월 경찰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성인가출이 2008~2012년 사이 32.5% 증가했다. 가정의학 전문가나 경찰은 그 이유로 ‘불황에 따른 가족해체’를 꼽았다. 자식과 가족을 버리고 떠났기에 무책임한 선택이라는 비판도 가능하다. 하지만 삶이 얼마나 힘겹고 고통스러웠을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자살률은 1997년 IMF 경제위기 직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을 넘어선 이래, 9년째 OECD 1위이다. 올해 9월 통계청이 발표한 2013년 사망원인 통계를 보면, 하루 평균 39.5명이 자살을 한다. OECD 평균인 12.1명의 3배가 넘는다. 특히 노동생산연령대의 주축인 40~50대 남성 자살률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 이런 중에 최근에는 경제와 자살이라는 말을 합성해 ‘경제적 자살’, 즉 ‘이코노사이드(econocide)’란 신조어가 생겨났을 정도이다.

자식과 가족과 생명의 포기를 단지 경제적인 이유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인간은 그저 경제적 동물인 것만은 아니다. 먹고 살기 힘들다고 모든 것을 내팽개치는 존재인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삶의 힘겨움과 고통을 견뎌내려면 어딘가 믿는 구석이 있어야 한다. 몸과 마음을 기댈 언덕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성인가출과 이코노사이드의 증가에는 믿는 구석도, 기댈 언덕도 없는 서민의 삶의 처지가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궁지에 몰린 서민의 삶을 헤아려줄 ‘그 누군가’가 없음을 확인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그 누군가가 되어줘야 하는 이들이 정당이고 국회이고 정부이며 사법부이다. 하지만 이들이 서민에게 신뢰를 받고 있지 못한 것이다.

서민들의 삶을 헤아려줄 행정기관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04년 서울고등법원의 전경. (출처 : 경향DB)


세월호 참사 유족들이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에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정당과 국회와 행정부와 사법부를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언론도 시민단체도 종교단체도 매 한가지다. 앞서 말한 신뢰도 조사결과에 따르면 언론과 시민단체, 종교단체의 신뢰도는 13.3%, 21.6%, 15.5%에 불과하다. 이들 역시 지금은 더욱 더 신뢰도가 떨어졌으리라. ‘기레기’라는 말이 생겨난 것을 볼 때, 중재의 힘을 잃었다는 시민운동가들의 자조 어린 푸념을 들을 때,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인이라는 염수정 추기경이 유족도 양보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비난받는 현실을 볼 때 그러하다.

신뢰집단의 형성이 시급하다. 보수와 진보, 계급과 계층, 세대와 지역, 분야와 영역을 가리지 말고 신뢰집단 만들기에 나서야 한다. 기존 권력체의 신뢰회복도 필요하지만, ‘새로운’ 신뢰집단의 형성도 필요하다. 정치권과 정부를 비롯해 여기저기서 혁신, 혁신한다. 그 혁신의 목표와 내용을 신뢰집단 형성에 맞춰야 한다. 그래야 쓸데 있는 혁신이 되고, 서민이 삶을 지속할 의지를 가진다.


김윤철 |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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