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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 옆에는 2차선 도로가 200미터 정도 이어진다. 좁은 길이지만 승용차들이 끊임없이 오가고 시내버스 두 개 노선과 마을버스까지 통과하기에 늘 북적인다. 그런데 주말이 되면 인근 주민들의 승용차들이 그 양쪽에 일렬로 가득 주차된다. 단속이 이뤄지지 않는 시간대에 편승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가운데 남은 공간으로는 버스 한 대 정도가 겨우 지나갈 수 있다. 노련한 운전사들에게도 난코스다.

차 한 대만이라면 조심스럽게 핸들을 조종해서 그럭저럭 지나갈 수 있다. 문제는 반대편에서 오는 차와 정면으로 마주칠 때다. 한 대가 옆으로 비켜서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경우가 많고, 뒤쪽으로 계속 차들이 꼬리를 무는 상황에서 후진하는 것은 엄두도 못 낸다. 그 결과 양쪽에서 여러 대의 차량이 꼼짝달싹 못 하는 사태가 가끔 벌어진다. 운전자들이 서로 상대방에게 양보하라고 배짱을 부리며 기 싸움을 하다가 상황이 점점 더 꼬이는 것이다. 경적을 울려대고, 화를 참지 못하고 차에서 내려 삿대질하기도 한다. 평온한 휴일 그 소음 때문에 심란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책임을 지거나 미안해하는 주민은 별로 없는 분위기다. 자신의 불법 주차가 원인인 줄 알면서도 나 몰라라 한다. 내 차 때문만은 아니라며 발뺌하는 마음이리라. 말하자면 집단적 위반 속에서 양심의 가책이 분산되고 희석되는 셈이다. 인구 밀도가 높아지고 익명화가 진행될수록 규범의 사각지대가 늘어난다. 자기의 편익만 쫓다 보니 다수의 불편이 초래되고, 결국에 모두가 피해를 입게 된다.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배려, 타인의 곤경에 대한 감수성이 있어야 한다.

그 기풍을 어떻게 배양할 수 있을까. 도덕심이나 윤리적인 의무감에만 호소해야 하는 것은 아닌 듯하다. 나를 넘어서 더 보편적인 이로움을 도모하려는 의지는 유희적인 즐거움에서도 우러나올 수 있다. 최근 선풍을 일으킨 루게릭병 환자 돕기 아이스버킷 챌린지가 한 가지 사례다. 그 대열에 사람들을 참여시키고 대중적인 관심을 유발한 동기는 재미다.

공공선을 전세계적인 놀이로 이끌어낸 아이스버킷 챌린지 (출처 : 경향DB)


재미의 본질 가운데 하나가 성취감이다. 자신의 행위가 상황에 영향을 주고 현실의 변화로 이어지는 것을 확인하면서 우리는 살아 있음을 느끼게 된다. 아이스버킷에서 참가자들은 자기 몸에 얼음물을 뒤집어씀으로써 불치병 환자들에게 도움을 주는 가운데 자기 효능감을 자각한다. 재미의 또 한 가지 본질은 유대감이다. 타인들과 의미 있게 연결되고 더 커다란 세계의 일부가 될 때 인간은 충만함을 느낀다. 아이스버킷에서 지명을 받은 사람은 다른 세 사람을 지명하여 릴레이에 동참시킨다. 참가자들은 기하급수적으로 확장되는 인류애의 연쇄 고리를 자발적으로 형성하면서 희열을 맛본다.

놀이 충동을 활용하여 삶과 현실을 개선하려는 시도는 다채롭게 이뤄지고 있다. 예를 들어 자동차 사고를 줄이기 위한 게임이 있다. 운전자들끼리 온라인 그룹을 만들어서 각자의 차량에 모니터 장치를 부착하여 서로 연결한다. 참가자들의 운전이 실시간으로 평가되는데, 과속, 급회전, 급브레이크 등은 감점 요인이 되고, 속도를 준수하며 부드럽게 움직이면 점수가 올라간다. 그리고 그 각각의 성적이 모두에게 공유되는 가운데 등수가 매겨진다. 참가자들은 순위 다툼을 하며 최대한 조심스럽게 차를 몰게 된다. 안전 운행이라는 목표의 달성 정도가 점수와 석차로 피드백되어 선의의 경쟁을 유발하는 시스템이다. 규칙 준수라는 무미건조한 과제를 게임으로 변용시키는 지혜가 돋보인다.

그런 소프트웨어는 일상의 여러 현장에서 창안된다. 가족들끼리 서로 미루기 일쑤인 가사노동을 항목별로 점수화하여 경쟁적으로 수행하게 만드는 ‘허드렛일 전쟁’(Chore Wars)이라는 무료 온라인 게임도 있다. 공공선에 대한 시민의 관심과 실천을 유도하는 기획에서도 참신한 발상이 이뤄질 수 있을 것 같다. 불법 주차를 줄이는 게임은 나올 수 없을까. 동네를 쾌적하게 만들기 위해 주민 참여를 유쾌하게 이끌어내는 퍼포먼스는 어떤 모습일까. 소박한 놀이 감각으로 선의(善意)를 발휘하도록 북돋는 일에 다양하고 발랄한 상상력이 모아지길 기대한다.


김찬호 | 성공회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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