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정치 칼럼

검사, 문제는 인사다

opinionX 2010. 4. 15. 15:35
저는 검사입니다. 요즘 공공의 적이 돼 버린 검사, 맞습니다. 한명숙 전 총리에 대한 1심 재판에서 무죄가 선고되자 다들 저희를 손가락질합니다. 야당이나 진보언론은 그렇다 칩시다. 보수 신문이 거들고, 여당 일부에서까지 눈을 부라리는 건 못 견디겠습니다. 쏟아지는 화살을 고스란히 맞고 있으려니 속에서 천불이 납니다.

왜 무리한 기소를 했느냐고요? 지방선거를 눈앞에 둔 정치인들은 검찰만 쳐다보고, 보수 신문은 한 전 총리 사건으로 지면을 도배하는 데 버텨낼 수 있었겠습니까. 「PD수첩」사건을 생각해 보십시오. 임수빈 전 부장검사는 능력을 인정받는 분이었습니다. 그대로 있었으면 ‘검찰의 별’이라는 검사장을 달고, 더 높은 자리도 바라보았겠지요. 그런데 그분은 PD들을 기소할 수 없다고 버텼습니다. 결과는 어찌 됐나요. ‘조인트’ 까이는 정도가 아니라, 옷을 벗었습니다. 그러면 후임 검사는 나중에 무죄가 나건 말건 피의자를 기소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판사는 정규직,검사는 비정규직

이런 말씀을 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판사들은 법률과 양심에 따라 정권의 심기를 거스르는 판결도 내리는데, 너희들은 왜 그러지 못하느냐고요. 구차하지만, 변명 좀 하겠습니다. 판사들은 임관 15년차까지 인사를 거의 예측할 수 있습니다. 첫 부임지는 사법시험·연수원 성적을 합산해 정해지지만, 이후에는 서울·수도권 초임자는 지방으로 가고, 지방 초임자는 수도권에 진입하기 때문에 순서만 다를 뿐 큰 차이가 없습니다. 

10~11년차까지는 지방법원 배석판사를 거쳐 단독판사 생활을 하고 12~13년차에 고등법원으로 갔다가 14~15년차에 지법 단독으로 다시 오거나 대법원 재판연구관이 됩니다. 16년차에 지법 부장판사가 될 때도 동기들이 나란히 올라가지요. 이후에도 다음 임지를 알 수 없다는 것 외에는 예측 가능합니다. 23~24년차에 고법 부장판사 자리를 놓고 다툴 때까지는 심한 경쟁이 없습니다. 고법 부장은 차관급으로, 검찰에서는 검사장에 해당합니다. 평검사가 검사장이 되려면 부부장-부장-차장 등을 거치며 간·쓸개 다 내놓고 살아야 하니, 판사들이 부럽지요. 판사들의 인사가 예측 가능하도록 이뤄지는 것은, 법관이 인사에 신경쓰게 되면 소신 있고 독립적인 재판이 어려울 수 있다는 우려 때문입니다. 심지어 판사들 가운데도 몇 해 전부터 ‘근무평정’이 인사에 반영되기 시작하면서 법원장 눈치가 보인다는 이들이 있습니다. 신영철 대법관의 촛불재판 개입 파문도 그래서 생긴 것 아니겠습니까.

판사가 정규직이라면, 검사는 비정규직입니다. 검찰에도 순환인사 원칙은 있지만, 서초동(대검·서울중앙지검)이나 과천(법무부)에 가려면 좁은 문을 뚫어야 합니다. 그러나 일단 엘리트 코스에 접어들면 서초동과 과천을 떠날 일이 없습니다. 한 전직 고검장은 검사 생활 29년 동안 5년만 지방근무를 했다는 ‘전설’을 자랑하지요. 윗분들의 눈에 들면 세상 여론도, 재판 결과도 상관없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고, 정연주 전 KBS 사장이 무죄를 선고받아도 해당 사건을 담당한 검사들은 좋은 자리로 갔습니다. 검찰 인사권을 누가 갖고 있습니까. 정권입니다. 정권이 원하는 대로 수사하면 탄탄대로가 보이지만, 버티다가는 보따리를 싸야 할 수도 있습니다.

순환 원칙 지켜 예측 가능하게

시국사건의 잇단 무죄 판결에 약이 오른 한나라당은 법관인사위원회의 60% 이상을 외부 인사로 채우겠다고 합니다. 인사 개입을 통해 판사들을 쥐락펴락하겠다는 계산입니다. 한나라당 안이 실현되면 판사도 검사처럼 신분이 불안정한 비정규직 처지가 되겠지요. 그러나 이 정권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 같습니다. 지금 절실한 것은 법관 인사제도 개편이 아니라 검찰 인사제도 개편입니다. 검찰 인사위원회야말로 독립성을 강화하고 외부 인사와 평검사의 참여를 늘려야 합니다. 그리고 순환인사의 원칙을 확고히 해서 ‘정치검사’가 되려는 유혹을 차단해야 합니다. 무리한 기소를 해 무죄 판결이 나온 검사는 인사에서 불이익을 줘야겠지요. 검찰 인사 시스템을 바꾸지 못하면 몇 년 후 또다른 검사들이 또다른 표적을 향해 돌진할 겁니다. 지금의 표적이 한명숙 전 총리라면 그때의 표적은 누가 될까요. 권력은 유한합니다.

'정치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가 전쟁을 말하는가  (0) 2010.05.25
그들이 ‘이름’을 내건 이유  (2) 2010.05.04
‘마초 공화국’에서 살아가기  (2) 2010.03.23
김연아를 놓아주자  (2) 2010.03.02
대통령 가족의 ‘민간외교’  (0) 2010.02.02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5/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