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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칼럼

김연아를 놓아주자

opinionX 2010. 3. 2. 15:26
김연아가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프리스케이팅에 출전하던 날, 나는 인터뷰 약속을 잡아놓은 상태였다. ‘사형수의 어머니’로 불리는 수녀님을 만나기로 돼있었다. 인터뷰 시간은 오후 2시. 늦지 않으려면 1시30분에는 출발해야 했다. 문제는 김연아의 경기시간이었다. 1시21분에 시작하는데 다 볼 수 있으려나, 그 뒤에 아사다 마오 경기는 어떻게 하지…. 마음이 갈팡질팡했다. 결국 아사다 연기까지 보고 김연아의 우승이 사실상 확정된 것을 확인하고서야 회사를 나섰다. ‘직업정신’은 뒷전으로 밀렸다.

약속에 5분쯤 늦었더니, 우리 나이로 여든인 노수녀가 건물 밖까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면목이 없어 핑계를 댔다. 김연아가 금메달을 땄다고, 그걸 보고 오느라 늦었다고. 순간, 수녀님의 얼굴이 환하게 피어났다. 그를 찾은 건 헌법재판소의 사형제 합헌 결정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무겁고 우울한 대화를 나눌 참이었다. 하지만 잠시, 우리는 현실을 잊었다. 김연아는 모두의 기쁨이었다.
 



 연합뉴스|경향신문 DB


김연아가 어제 귀국했다. 그의 국내 일정은 짧고 빡빡하다. 오늘 선수단 해단식과 청와대 오찬에 참석한 뒤 저녁 때 캐나다 토론토로 다시 떠난다고 한다. 사람들은 못내 아쉬워한다. 22일부터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세계선수권대회가 열린다는 걸 알면서도, 조금 더 머물렀으면, 조금 더 얼굴을 보여줬으면 하고 바란다. 

여왕의 길·국가 브랜드는 잊어라

사람들은 김연아의 미래를 궁금해한다. 2014년 소치 올림픽에서 2연패를 노릴지, 이번 시즌을 끝으로 은퇴할지, 은퇴한다면 프로로 전향할지, 연예계에 진출할지. 궁금증을 갖는 것은 자연스럽다. 김연아는 이제 한 사람의 스타를 넘어 시대의 아이콘이 되었으니. 하지만 우리에게 질문할 권리가 있다 해서 김연아에게 대답할 의무가 있는 건 아니다. 언론은 지치지도 않는지 ‘4년 뒤’를 묻고 또 묻는다. 김연아의 대답은 한결같다. “여태까지 이 올림픽 한 번만을 바라보며 달려온 것도 지치고 힘들었다.” “이제 막 올림픽이 끝났는데, 4년 후를 생각한다는 건 끔찍하다.” “아직 올림픽 챔피언이 된 게 믿어지지 않는다. 실감이 날 때까지 실컷 즐기고 싶다.” “진로에 대해선 시간을 두고 천천히 생각해보겠다.” 스무살 젊은 여성의 속내는 분명하다. 지금은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이니, 제발 방해하지 말아주세요.

그럼에도 성마른 이들이 있다. 김연아에게 ‘여왕의 길’이 시작됐다며 ‘인류의 자산’이라는 신분에 걸맞게 지성을 갈고 닦으라는 논객도 나왔다. 스탠퍼드를 다니는 미셸 위는 골프 투어 중에도 호텔방에서 리포트를 쓴다며 본받으라고 권한다. 기성세대는 이번 밴쿠버 올림픽에서 활약한 신세대를 솔직, 발랄, 유쾌하다고 상찬하지만 스스로는 촌스러운 엄숙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일부 신문의 사설을 보자. “김연아가 기여한 대한민국 브랜드 상승효과는 쏘나타 100만대를 수출하는 것과 맞먹는다.” “3·1절을 앞두고 일본 선수를 꼼짝 못하게 제압한 데서 국민들이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것이다.” 김연아의 연기는 그 자체로 탁월하다. 굳이 쏘나타나 반일감정까지 거론할 필요가 없다. 이제는 김연아의 어깨에서 ‘국가’니 ‘국민’이니 하는 짐을 덜어줄 때도 되지 않았는가.

나는 김연아가 한없이 자유로워지길 바란다. 세계선수권대회가 끝나면, 친구들과 수다 떨고 군것질도 하고 여행도 다니기를 바란다. 20대 청춘답게 상큼한 연애도 했으면 좋겠다. 당분간 스케이트 부츠는 신발장 깊숙이 넣어두었으면 한다. 아마도 살이 조금 찌고 몸도 약간 둔해질 것이다. 그러다 겨울이 다가오고 아이스링크가 그리워지면, 다시 스케이트를 꺼내 신으면 된다. ‘여왕’이 몇 달 쉰다고 ‘무수리’가 되지는 않는다. 그때쯤엔 브라이언 오서 코치가 언급한 대로 트리플 악셀이라는 새로운 목표에 도전해도 좋을 터이다. 

친구와 수다 떨고 상큼한 연애도

링크가 생각나지 않는다면? 그럼 얼음판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라. 그게 무엇이든 하고 싶은 것에 도전하라. 여왕의 품격이나 대한민국 브랜드는 잊어도 좋다. 김연아는 밴쿠버에서 금메달을 따기 전부터 우리에게 넘치는 행복을 안겨줬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김연아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 선택은 존중받아야 한다. 이젠 김연아를 놓아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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