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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나온 흥미로운 논문 두 편을 소개할까 한다. 하나는 2016년 말 ‘시민과 세계’에 실린 신진욱 중앙대 교수의 <한국에서 결손민주주의의 심화와 ‘촛불’의 시민정치>라는 논문이고, 다른 하나는 지난달 ‘한국사회학’에 실린 이철승 서강대 교수의 <세대, 계급, 위계: 386세대의 집권과 불평등의 확대>라는 논문이다. 신진욱의 논문은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2016년 말에 이미 결손민주주의 개념을 통해 사태의 원인과 향후 전망을 발 빠르게 분석해낸 통찰력이 돋보이고, 이철승의 논문은 필자가 평소 ‘386세대의 유통기한 만료 선언’이라고 부르던 현상과 거의 정확하게 같은 문제의식을 정교화한 것이어서 반가웠다. 두 논문을 교차해서 보면 오늘날 한국 정치의 저변에 흐르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준다.

“대선불복인가요?” 2013년 집권여당인 새누리당 정치인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던 칼이다. 국가정보원과 군의 대선개입 의혹을 문제 삼으려 하면 새누리당은 대선불복 프레임으로 모든 비판을 억눌렀다. 황우여 당시 새누리당 대표는 “역대 어느 대선에서도 선거사범을 문제 삼아 대선불복의 길을 걸은 일이 없다”고 했고, 최경환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대선불복의 유혹은 악마가 야당에게 내미는 손길”이라고 했다. 국정원이 대선에 개입한 것은 위헌이고, 선거법 위반이고, 국정원법 위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당은 “대선불복인가요?” 이 한마디에 변변히 힘 한 번 못 써보고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왜 그랬을까. 신진욱의 논문이 말해주는 것은 이명박·박근혜 정부 기간 동안 한국의 민주주의가 점점 더 퇴행하여 여러 결함을 가진 ‘결손민주주의’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흔히 1987년은 민주주의 원년으로 불린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87년 민주화의 핵심은 대통령직선제라는 ‘제도’를 되찾은 것이었다. 그런데 특정 제도가 있느냐 없느냐를 기준으로 민주주의를 판별한다면 민주주의는 ‘없는 것’ 혹은 ‘있는 것’이 되어버리고, 마치 컴퓨터의 알고리즘처럼 0과 1의 문제가 되어버린다. 1987년 이전에는 0(권위주의), 87년 이후에는 1(민주주의). 민주주의를 퇴행시키는 세력은 민주주의적 선거제도라는 껍데기만을 뒤집어쓴 채 민주주의의 실질적 내용을 모두 훼손한다. 언론장악, 민간인 사찰, 정치적 의사표현에 대한 검열과 처벌, 마침내는 선출되지 않은 비선실세에 대한 권력 위임에 이르기까지. 민주주의는 껍데기만 남아있을 뿐 모두 훼손되었지만 선거체제라고 하는 바로 그 껍데기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애매해진다. “대선불복인가요?” 이 한마디에 야당이 힘을 쓸 수 없었던 이유이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 민주주의의 내용적 요소 중 정치적 기본권과 시민적 자유에서는 상당한 진전이 있었지만, 문제의 근원인 수평적 책임성, 즉 권력의 상호견제에 있어서는 큰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박상훈의 책 <청와대 정부>가 울림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이철승은 “386세대가 권위주의적 발전국가에 대항하여 시민사회로부터 국가를 점유해가는 과정”을 분석한다. 그에 따르면 386세대는 “다른 세대에 비해 더 내적으로 응집된 ‘세대의 권력자원’을 시민사회, 시장, 국가를 가로질러 수립”했다. 그들의 권력은 이제 시작이다. 언론 부문에서 이 현상에 일찌감치 주목해온 ‘주간경향’ 정용인 기자가 ‘장기 386’이라고 부르는 현상이기도 하다. 여러 실증자료를 통해 근거를 제시한 뒤 이철승은 ‘세대 간 형평성의 정치’를 촉구한다. 나 또한 386세대의 일원으로서 그들의 뜨거웠던 헌신과 희생을 기억한다. 그러나 그것은 30년 전 일이고, 386세대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했던 1990년대 이후 20년에 걸쳐 보상받았다. 젊은 세대 일부의 극우화 경향이 처음 관찰되던 몇 년 전, 나는 이것이 ‘386세대의 유통기한 만료 선언’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다고 해서 도덕적 우위와 정치적 정당성을 독점하려는 태도를 젊은 세대는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386세대의 자기절제 없이 젊은 세대의 우경화를 막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두 논문을 교차하면 한국 정치의 보이지 않는 난제가 보이기 시작한다. 386세대는 결손민주주의를 치유할 수 있을 것인가. 직선제 쟁취라는 체제변화에는 성공했지만 민주주의의 실질적 내용을 채우는 데에는 지지부진했던 386세대에게 남아있는 소명은 무엇이고, 그들의 아성에 들어오지 못했던 젊은 세대와 여성에게 넘겨야 할 소명은 무엇인지 구분하는 자기 절제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 ‘쟁취하는 민주주의’가 아닌 ‘실천하는 민주주의’를 내면화할 수 있을 것인가. 30년 만에, 그들은 다시 한번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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