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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일이다. 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 국가들의 사회모델 비교연구를 위해 몇몇 나라를 방문해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의료, 연금, 복지 등을 담당하는 관료를 만났다. 프랑스는 GDP 대비 공적사회지출이 30%를 넘어서 OECD 1~2위를 다투고, 우리에 비하면 거의 세 배 가까이 된다. 문제는 프랑스의 재정적자가 30년 넘게 누적되고 있다는 점이다. 공적사회지출 30위권 바깥의 우리 입장에서 보면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흥청망청으로 보이기도 한다. 도대체 어쩌려고 저러는 걸까. 그에게 직설적으로 물었다.

“재정적자가 너무 쌓이고 있는 것 아닌가요? 반면 복지지출은 과도해 보이는데?” 그가 곤혹스러워할 줄 알았다. 그런데 뜻밖에 즉각 답이 돌아왔다. “프랑스에는 사회적 최저선이라는 개념이 있어요. 동지들이 사회적 최저선 미만으로 살게 내버려둘 수는 없어요. 그들을 위한 지출을 줄이는 건 처음부터 고려사항이 될 수 없습니다. 재정적자는 다른 방법으로 풀어야 해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동지들이라고? 처음부터 고려사항이 아니라고? 다른 사람도 아닌 관료의 입에서 이런 말을 들을 줄이야.

이런 말이 나오는 배경에는 프랑스의 역사와 공유된 사회적 가치가 있다. 공화국을 함께 만들었다는 자부심 말이다.

프랑스혁명의 3대 정신으로 흔히 자유, 평등, 박애를 든다. 앞의 두 단어는 괜찮은데 ‘박애’라는 번역은 적절치 않다. ‘박애’의 ‘박’은 한자의 ‘넓을 박(博)’인데, 이렇게 되면 박애는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박사’라고 할 때의 ‘박’도 같은 글자인데, 박사는 모든 걸 다 아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전공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요즘은 ‘우애’라는 번역도 쓰는데, ‘박애’보다는 낫지만 이것도 ‘친구를 사랑한다’는 밋밋한 뜻밖에 전달하지 못한다. ‘박애’의 원문은 프랑스어로 ‘fraternit’이고 영어로 옮기면 ‘fraternity’이다. 우리말로 옮기면 ‘동지애’ 혹은 좀 넓은 뜻으로 옮겨도 ‘형제애’가 된다.

1789년 프랑스혁명은 절대왕정을 무너뜨렸고, 오랜 기간의 역사적 간난신고를 거치며 공화정으로의 전환을 이루어낸다. 귀족과 성직자만 인간으로 대접받던 세상에서 모든 시민이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세상으로의 전환은 세계사의 획기적인 변곡점이고, 목숨을 걸고 이 전환을 함께 만들어낸 사람들은 ‘동지’이고 ‘형제’이다. 그러니 그들을 사랑해야 할 이유가 있다. 이것이 공화국이다.

마침 위에 인용한 관료가 소속된 부서의 이름은 ‘보건연대부(Ministry of Health and Solidarity)’이다. 우리로 치면 복지부에 해당하지만, 그들의 관점은 공적사회지출이 어려운 사람들 도와주는 ‘복지’가 아니라 ‘동지들의 연대’를 유지하는 수단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작명이다. ‘자유, 평등, 동지애’는 1946년 프랑스 제4공화국 헌법에 처음 명시되었고, 1958년 채택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제5공화국 헌법에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공화국의 핵심 가치이다.

이런 역사가 다른 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헌장에도 나와 있다. 임시헌장 1조는 민주공화국, 3조는 평등, 4조는 자유를 각각 명시하고 있다. 프랑스혁명의 3대 정신이 모두 담겨있는 셈이다. 마침 2월18일자 경향신문이 마련한 윤평중 교수와 김호기 교수의 대담은 이 점을 잘 상기시켜주었다. 두 학자가 지적했듯이, 우리는 100년 전에 이미 제국에서 민국으로의 전환을 이루었고 민주와 공화는 유신헌법이나 5공화국 헌법도 감히 지워버리지 못한 채 유지되어 온 우리 사회의 핵심 가치이다. 예나 지금이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수구적 퇴행의 늪으로 달려가고 있는 자유한국당 전당대회의 와중에 김진태, 김순례, 이종명 세 사람이 역사왜곡 전문가를 내세워 저지른 망언 파동이 큰 물의를 빚고 있다. 그들이 저지른 망언은 단순히 5·18민주화운동 희생자들에 대한 모욕에 그치지 않는다. 그들의 망언은 단순히 민주주의 역행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공화국, 즉 우리의 공동체에 대한 배신행위이다. 한국전쟁에서 목숨을 바친 수많은 이들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의 공화국이 있을 수 없었듯이,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이들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의 공화국은 없다. 진보·보수가 다를 수 있고 정책에 대한 입장이 다를 수 있지만, 우리의 공동체 자체를 배신한 자는 더 이상 우리의 동지가 아니다. 알고도 정치적 이득을 위해 망언 소동을 일으켰다면 스스로의 후안무치에 부끄러워해야 하고, 몰라서 그랬다면 스스로의 무지를 부끄러워해야 한다. 징계나 제명이 문제가 아니다. 공화국의 배신자들은 두 번 다시 우리 사회의 어떤 공적인 자리에도 설 수 없게 해야 한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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