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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장년층을 대상으로 노후 준비 문제를 놓고 토론과 강연을 하다 보면 놀라게 되는 문제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노후준비를 소비자로서의 문제, 즉 ‘어느 만큼 돈을 쟁여놓아야 죽을 때까지 필요한 소비의 구매력을 확보할 수 있는가’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인생의 다른 측면인 생산자로서의 문제, 즉 ‘사회적 생산에 참여할 수 있는 나의 능력을 어떻게 죽을 때까지 유지하고 확장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로 보는 이는 만나보기 힘들다. 하지만 훨씬 심각한 문제는 전자보다 후자에 있다.

한국인들 특히 중산층의 정규적인 취업기간은 이제 20년 남짓의 기간으로 줄어들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연속극의 단골 인물 유형이었던 ‘만년 과장’이라는 말은 사라진 지 오래다. 28세에 대기업에 취직한 이들은 임원 승진에 실패하면 대략 50세가 되기 전에 직장을 떠나야 한다. 그 이후에도 최소한 십 몇 년은 더 이리저리 경제활동을 이어가야 할 처지이지만, 벌이가 그 전만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그러니 30대와 40대는 초조할 수밖에 없다. 사회보장시스템이 불비하고 국가에 의한 소득재분배 효과가 거의 없는 한국 경제는 모두 알아서 스스로를 챙겨야 하는 ‘각자도생’의 나라이다. 따라서 이들은 자식의 교육비(자칫하다간 결혼 밑천까지), 그 20년간의 생활비, 자신의 노후준비 등 ‘3대’가 지출할 돈을 모두 이 기간에 벌어 쟁여놓아야 한다는 ‘미션 임파서블’을 항상 등골 위에 얹어 놓고 살 수밖에 없다. 한국 전쟁은 휴전협상 기간에 가장 치열하고 사상자도 많았다. ‘일몰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고 느끼는 한국의 40대들은 조금이라도 더 벌기 위해 ‘전장’을 떠날 줄 모르고, 몸과 정신과 건강을 아낌없이 던진다.

그 결과는 ‘번 아웃’이다. 영어라서 안됐지만, 한없이 계속되는 과도한 노동으로 몸과 마음과 정신이 모두 소진당하고, 마치 다 탄 장작개비마냥 끝장이 나버린 모습을 이렇게 잘 표현한 한국말이 아직 없는 듯하다. 자본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효율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사람들이 서른 가까이 축적한 노동 능력을 불과 20년 만에 쪼옥 빨아들이고 내뱉어 버리면 되니까. 하지만 그 사람들 본인의 삶은 굉장히 괴롭다. 우선 그렇게 ‘번 아웃’되도록 몸과 마음을 던진 끝에 아까 말한 ‘미션 임파서블’에 과연 성공할 이들이 몇이나 될지도 심히 의문이지만, 훨씬 근본적이고 심각한 문제가 있다. ‘번 아웃’되어 버린 사람은 생산 능력과 그 발전이라는 생명 자체에 내재한 힘의 원천을 영영 되찾지 못할 수 있다는 점이다.

번아웃 증후군 (출처 : 경향DB)


축복인지 재앙인지는 참으로 말하기 고약하지만, 평균 수명의 연장으로 ‘100세 시대’가 점점 가까이 오고 있다. 그런데 반면 아까 말한 의미의 정규적 ‘취업기간’은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그래서 인생 주기 동안 하나가 아닌 두 개 이상의 직업적 이력을 쌓는 것이 가능하며 또 필수적이라는 의미에서 ‘인생 2모작’이라는 말이 종종 쓰이기도 한다. 하지만 ‘번 아웃’되어 버린 사람에게 과연 이런 게 가능할까? 2모작을 위해서는 봄에 심을 작물과 여름 혹은 가을에 심을 작물을 나누어 심어서 토양의 생명력이 한 번에 빨려나가는 일이 없도록 해야만 한다. 하지만 직장생활을 하는 한국의 중장년들에게 과연 자신의 생산 능력을 발견하고 또 스스로 발전시켜나갈 기회와 여건이 주어지는가? 몸은 과로와 술과 운동부족과 영양불균형에 시달리는 경우가 태반이다. 취미를 갖는다든가 흥미있는 주제와 영역에 대한 관심을 발전시킨다든가 하는 일은 시간적·경제적으로 또 마음의 여유에 있어서 꿈도 꾸기 힘들다.

50세에서 100세까지 일하지 않고 살 수 있을 만한 자금 축적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하다. 그보다는 자신의 생산자로서의 힘과 능력을 절대 소진시키지 말고 일생 동안 관리하며 유지해 나가는 것이 훨씬 현실적이다. 이를 위해서는 ‘번 아웃’을 피하라. 당장은 벌 수 있을 때에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뛰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하지만 당신 몸과 마음의 활력까지 모조리 자본에 넘겨주고 하얀 재로 타버리는 짓은 하지 마라. 인생은 길며, 당신의 생산 능력은 앞으로도 오래오래 타야 할 생명의 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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