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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은 당선 이후 국정수행의 첫 번째 업무로 일자리 상황을 점검하고, 대통령 직속 일자리위원회 구성을 지시했다. 대통령은 첫 번째 외부 방문지였던 인천국제공항에서 임기 중 비정규직 문제를 반드시 해결하겠다면서 우선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시대를 선언했다. 반년이 흘러 올해도 며칠 안 남았지만, 정규직 전환은 새로운 갈등 양상을 빚고 있다. 특이한 것은 이 갈등의 진앙이 사용자나 자본이 아니라 노동자 사이의 갈등 양상을 띤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노노(勞勞)갈등이란 단어가 등장한 것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 직후부터였다. 당시 주류언론은 어용노조와 민주노조의 갈등을 일러 노노갈등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노노갈등이란 말은 1997년 경제위기 이후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고용불안정과 구조조정이란 자본의 압력에 굴복한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차별하는 데 앞장서고 있는 것이다. 20년 동안 우리 사회가 이렇게 변한 이유는 무엇일까?

스탠리 밀그램의 ‘권위에 대한 복종(Obedience to Authority)’ 실험에서 영감을 받은 워튼스쿨의 J 스콧 암스트롱 교수는 제약회사 업존의 사례를 들어 ‘주주이익의 극대화’ 실험을 실시했다. 1970년대 미국의 제약회사 업존이 개발한 신약 ‘파날바’는 매월 100만달러의 이득을 거둬들일 만큼 잘 팔렸지만, FDA(미국식품의약국)는 이 약의 부작용을 의심해 판매 중단을 권유했다. 업존은 특별이사회를 열어 이 문제를 논의했으나 법정공방을 통해서라도 판매기간을 최대한 연장한다는 결정을 내려 사회적 지탄을 받았다. 실험에 앞서 상황을 설명하고 어떻게 할 것인지 물었을 때, 피실험자의 97%가 판매 중단을 선택했지만, 이들에게 업존의 임원 역할을 맡기자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왔다. 100여차례에 걸쳐 모의이사회를 열었으나 판매 중단을 결정한 팀은 단 하나도 없었다. 이 실험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사회구조(권위)의 호명에 무의식·무비판적으로 응답하는 순간, 구체적 개인이 특정한 주체로 재구성된다는 알튀세르의 명제를 입증해보였다.

자본주의의 위기가 점쳐질 때마다 자본주의는 새로운 해법을 발견해냈다. 과거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집필하던 시절의 자본가란 머리에 실크햇을 쓰고, 입에는 고급 시가를 문 극소수의 남성들에 불과했지만, 오늘날 ‘대중자본주의(people’s capitalism)’의 시대에 이르러 자본가란 곧 대중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우리나라 역시 1962년 증권거래법이 제정된 이래 경제개발을 위한 자금조달 수단으로 적극적인 증시육성정책을 펼쳤다. 1980년대부터 국가기간산업이나 공공성이 높은 기업 주식이 국민주 형태로 보급되면서 주식대중화 시대가 열렸다. 외환위기 이후 평생직장의 신화가 깨지고, 노동시장을 통해서는 불평등한 계층구조를 극복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들은 얼마 안되는 여유자금을 주식과 펀드에 쏟아부었다. 2003년부터 시작된 적립식 펀드 투자가 21세기 부자가 될 수 있는 막차로 여겨지면서 주식과 펀드 투자 광풍이 일었다. 2007년 주식형 펀드 계좌수가 2000만개를 넘었고, 1가구 1펀드를 넘어 1인 1펀드 시대가 되었다. 주식 투자자 역시 경제인구 5명 중 1명꼴이 되었고, 그 가운데 20대의 비중이 가장 높다.

경제위기 20년의 불안은 우리의 영혼을 잠식해 들어갔고, “함께 살자”는 외침은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처참한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개인은 다양한 정체성을 통해 구성되지만, 지난 20년 동안 우리는 노동자나 시민의 정체성은 약화된 대신 스스로를 경영하는 자본가의 정체성을 강화해 왔다. 불평등을 정당화하고,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려는 노력을 등한히 한다면 그 사회는 결국 붕괴하고 말 것이다. 우리가 사회적 소수, 약자를 보호하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결코 그들을 동정하거나 불쌍하게 여기기 때문이 아니라 오늘 그들이 처한 운명이 바로 내일 우리가 처할 운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속한 사회가 나 또는 다른 구성원에게 슬픔을 준다면 우리는 스스로의 삶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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