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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영화나 드라마는 오래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워킹데드(Walking Dead)>라는 티브이 드라마는 지난 몇 년간 미국에서 선풍적 인기를 누리고 있죠. 한국에서는 <부산행>이라는 놀라운 걸작이 나왔습니다. 이런 작품은 보통 좀비의 무서움을 묘사하며 시작하지만, 곧 좀비보다 무서운 게 사람이란 걸 보여주죠. 혼란 속에서 그 어떤 괴물보다 무자비한 인간의 얼굴을 그립니다.
그런 무자비함은 무정부 상태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습니다. (좀비, 핵전쟁, 외계인 침입 등에서 시작한) 무정부 상태가 숨겨졌던 본성을 깨우는 것은 아닙니다. 본성은 그대로죠. 무정부 상태에서는 다만 서로서로 믿을 수 없을 뿐입니다. 보통 때는 분쟁이 있으면 법원을 갑니다. 공권력은 범죄자를 잡아 격리해 죗값을 묻게 하죠. 내 멋대로 살고 싶지만, 나의 안전을 위해 자유를 어느 정도 포기하고 그 질서를 따릅니다. 덕분에 사람들은 지나가는 저 사람이 갑자기 나를 때리지 않으리라는 안심을 합니다. 계약하면 지켜지리라 믿죠.
정부가 없으면 이 모든 안전장치와 이에 따른 사회적 신뢰와 질서가 사라집니다. 당장 내 몸을 지키기 위해 작은 막대기라도 잡아야죠. 옆 사람은 자연스레 불안해집니다. 내 몸을 지키기 위한 것일 뿐이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습니다. 무법천지에서 그 사람도 별수 없습니다. 슬며시 막대기 하나를 집습니다. 혹시 모르니 칼 한 자루도 챙깁니다. 그리고 날 보며 웃습니다. 걱정 마. 널 해치려는 것은 아니야. 나는 총을 찾고, 그 사람은 탱크를 찾고. 끝이 없죠.
내 안보가 증가한 만큼 옆 사람 안보가 줄어드는 딜레마에 빠진 겁니다. 사람이 나빠서가 아닙니다. 서로 미워해서도 아니죠. 말이 안 통해서도 아닙니다. 말을 보증해줄 정부가 없어서죠. 영화나 드라마뿐만이 아닙니다. 현실에선 국제정치가 그렇죠. 국제연맹과 여러 기구가 있고 국제법, 규약, 도덕 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국가 행동을 규제하고 강제할 법과 처벌장치는 많이 모자랍니다. 특히 국가 안보에서 더욱 그렇죠. 우방이니 친구니 말은 많지만 결국 안보를 책임지는 것은 온전히 자기 몫임은 국제정치에서 잘 드러납니다. 이라크가 한때 우방이었던 미국의 손에 파괴된 게 2003년이었죠.
이런 국제정치의 태생적 원리를 이해한다면 북한의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 개발이 위협만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아무리 대화를 종용해도 번번이 핵무기에 매달리는지도 알 수 있죠. 핵무기 개발에 환호하는 북한 인민의 심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김정은 위원장은 신년사에서 평창 올림픽에 대표를 보낼 수 있다고 했고 이를 위해 남북 당국이 시급히 만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갑작스러운 대화 공세에 의아해하고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이도 있습니다. 당장 서방 외신은 한·미동맹을 약화하기 위한 정치공세라는 해석을 보도했고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도 신년사 환영을 북한 책략에 놀아나는 것이라 일축했죠. 하지만 이는 북한이 마침내 안보 딜레마를 해소하면서 비로소 자신감이 생긴, 국제정치의 원리를 간과하는 겁니다.
무법천지인 세계정치에서 자신을 지킬, 김정은 위원장 표현에 따르면 ‘평화수호의 강력한 보검’을 얻고서야 남북대화의 기회가 온 겁니다. 역설적이죠. 사실 북핵 개발로 한국 안보 상황이 크게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북한의 위협은 지금도 예전과 마찬가지로 재래식 무기와 휴전선~서울의 짧은 거리에서 오죠. 계산이 크게 바뀐 쪽은 미국입니다. 한국으로서는 오히려 기회입니다. 차분하게 미국, 북한과 대화를 이어가며 평화의 공간을 늘려야 합니다.
문재인 정부는 당장 대화를 시작하자고 화답했습니다. 환영할 일입니다. 이를 기회로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을 되살려야 합니다. 종북이네, 이간질에 속네 하는 소음도 작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서두르지 않으면 한국은 미국, 중국, 북한, 러시아 등 핵무장 국가 사이에서 아무 목소리도 낼 수 없게 될 테니까요.
좀비 영화나 드라마는 보통 질서의 회복으로 끝납니다. 한반도에서 그 질서는 상호교류와 신뢰 회복입니다. 2018년은 그 회복을 시작한 해로 역사에 남기를 기원합니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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