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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들에 거친 바람이 매섭게 몰려다닌다. 몸을 피할 곳이 없어 나는 저 바람을 고스란히, 죄다 받아냈다. 비교적 이른 아침이고 인적이 없는 경주 황룡사 폐사지에 그렇게 홀로 서 있었다. 갑자기 현실로부터 이격되어 이곳에 던져진 느낌이다. 그저 남은 것이라곤 땅에 박힌 몇 개의 둥글고 납작한 돌뿐이거나 당간지주만이 덩그러니 서 있다. 그 거대한 돌들, 한때는 구체적인 형상을 지녔다가 지금은 모조리 마모되고 문드러져 버린 최후의 흔적만을 겨우 거느린 파편들이 드센 바람과 추위 속에 완강하게 박혀 있다. 아득한 시간의 입김 아래 무너진 돌은 거의 땅과 하나가 되어 가라앉아 있다. 모든 것은 결국 이렇게 수평의 존재가 되어 지워질 것이다. 이곳은 그렇게 지워져 버린 것들, 비어 버린 것들로 채워진 역설의 공간이다. 텅 빈 자리를 대신해 바람소리와 지난 자취들이 환영처럼 몰려다닌다. 이 자리에서 지난 시간을 악착스레 기억하고 죽은 이들을 애도하고 그들의 삶의 자리와 생의 욕망을 위무하고 그들 하나하나의 존재에 연민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이곳은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공간이다. 이 점이 지금 살아있는 존재를 흔드는 마력인가 보다.

저쪽으로 황룡사 복원연구소인가 하는 건물이 거창하게 자리하고 있다. 조악하고 괴이하다. 앞으로 이 자리에 황룡사를 복원할 예정이라고도 한다. 과연 그런 황룡사는 어떤 황룡사일까? 왜 이 빈자리, 소멸의 자리, 텅 빈 공간 그 자체를 남겨두지 않으려 할까? 산 자들이 이곳을 순례하면서 볼 수 없는 것을 통해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헤아리고 부재와 소멸을 기억하고 앞서 간 모든 이들을 애도하는 자리를 남겨두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황룡사 절터와 그 앞에 위치한 분황사, 저쪽으로 보이는 첨성대 그리고 계림과 양동마을 등을 둘러보는 짧은 경주의 일정이었다. 경주에 있는 모든 것들이 나를 사로잡는다. 이곳은 죽은 이와 산 자들이 공존하는 공간이고 옛사람들의 유물과 지금 살아 있는 이들의 삶의 힘들이 공모 관계를 형성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자리는 형편없이 사라지거나 끔찍하게 각색되어 버렸다. 도시 전체가 전통의 키치화로 포장되거나 조악한 사물들로 대체되고 있다. 이상하고 조잡한 관광지로 변모하고 있는 경주는 진정한 애도의 흔적을 만나려는 이들을 억압한다. 그래도 아직 남아있는 폐사지와 흩어진 돌무더기, 마모된 석불, 곳곳에 융기된 큰 무덤과 오래된 나무만으로도 경주는 여전히 경주다. 특히 나는 계림 안에서 크고 둥근 무덤과 느티나무를 보았다. 단단하고 차가운 피부로 응축된 나무는 길고 혹독한 겨울추위를 견딜 최소한의 신체성으로 직립하고 있었다. 그 단호한 나무의 물성과 색채는 처연하고 신비로웠다. 언어와 문자의 그물 사이로 빠져나가는 색채, 형언할 수 없는 기이한 색상을 몸에 감은 나무들 사이로 벅차게 부풀어 오르는 무덤들은 수평으로 돌아가길 거부했던 이들의 간절한 저항이었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항거와 불멸에 대한 기원이 들러붙어 이룬 무덤의 곡선이 태양을 향해 이룬 수직의 나무들과 공존하는 계림은 죽음과 삶, 부재와 영원이 길항하는 공간이다. 동에서 터 오는 태양빛을 가장 먼저, 충만하게 받아내는 이 계림은 죽은 이가 영생을 도모하는 공간적 연출이자 영원한 생명의 순환을 몸소 겪어내는 나무들이 어우러져 있는 장소성을 제공한다.

경주에 머문 반나절의 여정은 소멸과 부재, 죽은 이들의 빈자리를 둘러보는 일이었다. 유적지를 다니는 일이나 예술작품을 보는 일도 그렇고 박물관에 진열된 유물들을 응시하는 일도 결국은 무엇인가를 애도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애도란 단지 죽은 이를 추억하고 기념하는 일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현재의 삶을 반성하고 지금의 삶에 구멍을 내는 일이기도 하다. 나를 있게 한 기원과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는 일이자 신비하면서도 덧없는 조건인 삶을 헤아리는 것이다. 조르조 아감벤은 “살아남은 자의 소명은 기억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나는 이곳에서 선인들의 자취를 헤아리고 그들의 삶을 떠올리고 부재의 자리를 들춰낸다.

문화와 예술은 그 애도를 표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는 애도의 의미와 의례를 상실한 지 오래되었다. 사라진 이들과 남은 이들에 대한 애도가 절실한 때다.

박영택 | 경기대 교수·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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