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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끝별 | 시인·문학평론가



▲ 싸락눈 내리어 눈썹 때리니


싸락눈 내리어 눈썹 때리니

그 암무당 손때 묻은 징채 보는 것 같군.

그 징과 징채 들고 가던 아홉 살 아이 -

암무당의 개와 함께 누룽지에 취직했던

눈썹만이 역력하던 그 하인 아이

보는 것 같군. 보는 것 같군.

내가 삼백 원짜리 시간강사에도 목이 쉬어

인제는 작파할까 망설이고 있는 날에

싸락눈 내리어 눈썹 때리니….


- 서정주(1915∼2000)


 



△ 시간강사 시절이었다니 1960년 전후의 겨울방학 직전이나 개학 직후였나 보다. 목이 쉬도록 말품을 팔고 나오는 날 싸락눈이 내린다. 싸락싸락 숱 많은 눈썹에 싸락눈이 내려앉자, 선득하니, 암무당의 손때 묻은 징과 징채를 들고 다녔던 ‘눈썹만은 역력했’던 아홉 살 아이를 떠올린다. “암무당의 개와 함께 누룽지에 취직했”다니, 그것도 ‘취직’이라면 ‘취직’이겠다. 누룽지든 남은 밥이든 눈칫밥을 얻어먹는 걸로 치자면 개나 아홉 살 아이나 시간강사나 매한가지겠다. 오십보백보겠다! 


차디찬 눈발을 눈썹에서부터 맞으며 십리, 이십리를 걸어야 하는 사람들에게 싸락눈은 내리지 않고 때린다. 바람은 차고 싸락눈은 때리는데, 징과 징채는 절어만 가고, 개꼬리는 말려들어만 가고, 배고픈 아홉 살 눈썹은 날로 역력해져만 가고, ‘삼백 원짜리’ 시간강사의 목은 쉬어만 가고… 인제는 그만 작파해버리고 싶은 날, 싸라기 같은 눈을 맞으며 암무당을 따라다녔던 아홉 살 아이를 생각하면, 그래도 이게 어디냐며 싸락눈이 죽비처럼 눈썹을 때린다. 쌀랑쌀랑 하늘의 흰 것들이 땅의 검은 것들을 때린다. “어찌할꼬?/ 어찌할꼬?/ 너와 내가 까 놓은/저 어린것들은 어찌할꼬?”(‘신년유감’)라며, “괜,찬,타,… 괜,찬,타,…”(‘내리는 눈발속에서는’)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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