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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우리는 우록에서 놀았다
(출처: 경향DB)
십만 원이면 사슴피 한 잔을 마실 수 있다는
우록에 갔다 동네 테니스회 야유회 날이었다
모자를 눌러쓰고 쭈그리고 앉은 사내들 운명적
대어(大漁)를 꿈꾸는 유료 낚시터 지나, 빠듯한 외통수
길을 따라갔다 맑은 물 흐르는 시냇가에 봄풀을
뜯는 염소들 뾰족한 입에서 흰 이빨이 빛났다
마리당 이십만 원에 두 마리를 잡았다고 회장님
말씀하시자 모두들 기립 박수를 했다 미리 연락
받고 상 차려놓은 터라, 손 씻으러 수돗가에 갔다
비누와 수건이 놓여 있는 그곳에 아직 치우지 않은
식칼과 도마가 있었고 군데군데 염소 수육이 흩어져
있었다 수육의 살점이 성기 속살처럼 거무튀튀했다
- 이성복(1952∼ ) 부분
△ 산록(山麓·산기슭)의 신록(新綠)에 묻혀 우록(암사슴)과 더불어 우륵이 만들었다는 가야금이라도 뜯어야 할 것만 같은,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첩첩산중 ‘우록(友鹿, 사슴을 벗 삼다)’은 대구 인근의 계곡마을이다. 은거와 은둔, 신선과 도학(道學)의 기세가 등등했던 이곳은 백록고시원이 생기고 고향염소집이 생기더니 어느덧 돈과 도살 위에 꽃핀 음주가무와 노소동락(老少同樂)의 명소가 되었다. 십만 원이면 사슴피가 한 잔, 이십만 원이면 염소가 한 마리! 대어를 낚기 위한 유료 낚시터가 있고 성기 속살처럼 거무튀튀한 수육과 염소의 피냄새가 그득한 곳, 색(色)스럽고 육(肉)스러운 보양과 취흥의 “붉은 해가 산꼭대기에 찔려/ 피 흘려 하늘 적시고” “-여기가 어디냐고?/ -맨날 와서 피 흘려도 좋으냐고?”(‘여기가 어디냐고’) 물어야 할 곳이 되었다. 사슴 뛰놀던 심심산천의 우록은 말이 없고, 우록에서 놀던 우리는 우록의 살과 피로 불끈불끈하곤 한다. 자연의 신비와 현실의 적나라(赤裸裸)는 이렇게 한통속이기 십상이다. 생명과 욕망은 펄떡펄떡 살아있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하나로 잇대져 있다. 우록처럼. 그러니 우록, 너무 환해 캄캄하니, “가지 마라, 굳이 못 갈 것도 없지만/ 가지 마라, 다시는 당신 못 돌아온다”(‘동곡엔 가지 마라’)!
정끝별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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