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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별의 노래


나는 ‘목숨을 구하는 약이라도 되는 듯 네 이름을 혀 위에 올려놔 본다’라고 문자를 보낸다 곧 너는 ‘그럼 내가 약장수네?’라고 슬며시 피하는 답신을 보낸다 그러곤 우리는 인큐베이터 속에서 사라져가는 생명을 응시하듯 각자의 반짝이는 창문 앞에서 희미하게 웃는다 따라오지 마, 이곳은 죽는 길 그러면서 너는 벼랑 위를 사뿐사뿐 건너간다 나는 너와 계속 장난칠 수 있게 벼랑에 부딪치는 햇빛도 바람도 소나기도 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네가 풀섶에서 우연히 찾아내고 기뻐하는 새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나는 죽을 몸, 어서 네 가족들에게 돌아가 멍멍개야! 그러면서 너는 내 앞발을 붙잡고 쎄쎄쎄 해 준 뒤, 쫑긋한 두 귀 사이를 여러 번 쓰다듬어 준다 이제 됐지? 입을 열면 할 말은 나오지 않고 그저 낑낑거리는 네발짐승의 목소리 꼬리는 이 동물의 몸에 붙은 습관대로 만날 때나 이별할 때나 다른 표현을 모른 채 똑같이 흔들리는데, 너는 태양 속에서 마개를 연 환타 한 병 같은 미소를 남기고, 벼랑 뒤로 사라진다


- 서동욱(1969~ )


아무래도 사랑은 고독을 동반하는 정서이다. 진실로 고독한 사람은 종종 자신의 존재가 둘로 나뉘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곤 하는데, 그것은 자기 속에서 분리되어 나온 자기 자신을 보는 일과 같다. 나에게서 빠져나온 꽤나 멀어진 ‘다른 나’, 그런 ‘타자’를 발견해내는 일이 고독이 아닐까. 나는 타자에 대해 낯설어하면서도 다가가고 싶고, 떨어지고 싶으면서도 매혹될 수밖에 없다. 인간이 스스로에게 몰입하기 위해 고독을 택했던 것처럼, 현현하는 누군가에게 나를 투사하는 일이 사랑인 것이다. 때문에 타인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나는 살아갈 수 있고, 타인이 나의 목숨이자 벼랑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랑이 가능하려면 우선 나는 나와 이별을 해야만 한다. 그렇게 홀린 듯 복수주체가 돼야만 하고, 정인(情人)의 창문에 부딪치는 “햇빛도 바람도 소나기도” 모두 될 수 있다고 믿어야만 한다. 이렇듯 사랑은 ‘되기’의 생성 질서를 가지면서도 온전히 나를 포기하고 마는 고독이다. 우리는 또 어떤 고독에 나를 양보하며 질서를 깨야 할까. 이별이란 말 안에 나의 실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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